군자동[(君子洞)군자정 · 예동 · 동정]
군자정(君子亭)마을)
이충무공께서 수군절도사로 여수에 부임한 1551년대에 여수공고입구 근처에 설치되었고 1935년에 광무동으로 옮겼다가 1975년에 다시 종고산쪽인 군자동 23번지인 현 위치로 옮긴 후 한일합방이 되면서 1930년경 중앙동과 신항을 연결시키는 대판동 도로를 개설하면서 성의 일부를 뜯고 중앙동 해안을 매립하면서 성의 자재를 활용하여 좌수영성이 해체되어 성곽 안에 공공기관 및 주민이 거주하면서 주민의 유입이 많아 번창하기 시작했으나 현재는 중복도로가 동의 허리를 관통하여 개설되어 동세가 약해지고 지형이 높아 현대 생활에 많은 불편을 주므로 인구가 계속 감소 영세민촌으로 전락되었다.
군자정터(君子亭ㅡ)(연처포연각)
군자동에 있는터.수군절도영이 없어진뒤 궁동으로 옮겼음.
좌수영성(左水營城)
전라좌수영 2대 절도사 박양신장군이 성종 16년(1485)에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착공 5년 7개월에 걸쳐 1491년에 완공하였으며 성(域)의 규모는 주위가 3,643척,높이 13척, 동서길이가 1,200척으로 남북 길이가 908척으로 면적은 35,700평 가량되어 군자, 동산, 관문, 고소, 중앙, 교동이 포함된다.그리고 성문(城門)은 동문(東門), 서문(西門), 남문(南門)등 세곳이 있는데 1930년 일제시에 도로를 개설하고 항만 매립으로 헐어서 형태가 없어져 아쉬움이 있지만 옛 성터만 남아있다.
여수향교(麗水鄕校)
군자동 가운데에 있는 여수시의 향교로 지방의 교육을 맡은 향교는 1897년에 여수군이 설치되자 조동훈 군수에 의거 군자동 165번지인 현위치에 세워졌다.그리고 그 당시에는 대성전 3칸, 명륜당 정문, 동서문, 동서무를 지었는데 현재는 대성전 3칸, 명륜당, 봉화루만 남아 있다.
동각(마을)
군자동에 있는 마을로 현재 군자정 노인정이 있는곳을 말함(여수시 군자동 244번지)
서문밖(서문외)
조선 성종때 축조한 좌수영의 서문이 있는데 서쪽 방면에 있던 서문밖의 마을 즉 지금의 중앙동 장한의원에서 군자동으로 오르는 계단길을 중심으로 왼쪽 지역을 서문 밖이라 부르고 있다.
서문터(통외문터)
군자정 서쪽에 있는 군성 서문의 터
망해루(望海樓)
진남관 앞 계단에 있는 문루. 여수시에서 옛터의 망해루 자리에다 다시 복원함.
석인칠구(石人七軀)
진남관 앞뜰에 있는 유물로 지방 문화재 33호이며 임진왜란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거북선을 매놓기 위하여 돌로 사람 일곱을 만들어 남문밖 선창에 세웠는데 그뒤에 이 곳으로 옮김.
석주화대(石柱火臺)
진남관 앞뜰에 있는 유물로 높이 170cm인데 이충무공이 직접 사용한 것으로 보는데 돌로 촛대를 만들고 불을 켜게 하였다. 본래는 4개가 있어서 하나는 진남관 앞뜰, 또하나는 동헌 앞뜰, 두개는 선창에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없애버리고 현재 2개만 남아있음.
군청터(郡廳) ·운주헌터(運籌軒ㅡ) · 간숙당(簡肅堂)
진남관 동북쪽에 있는터. 성종 10년(1479)에 창건하였으며 고중 6년(1869)에 절도사 이종진(李鍾晋)과 조문현(趙文顯)이 중수하고 같은 32년(1895)에 군청으로 쓰이다가 1930년 무렵에 불타없어지고 그자리에 군청을 다시 지어쓰다가 1934년에 군청을 공화동으로 옮김.
장백호정터(白虎亭ㅡ)
여수향교 자리에 있는 사정 터
주홀루터(柱笏褸ㅡ)(완경루)
운주헌터. 서쪽에 있는 주홀루의 터
큰생골(大泉)
충무동 태양다방 뒤의 충무동, 교동, 군자동 삼거리부근의 마을을 큰샘골이라 한다.
종동(鍾洞)(마을)
본래 여수군 여수면의 지역으로서 종동이라 하였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정에 편입되었다가 1946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다시 종동이라 하여 1953년 여수시 행정구역 확장에 의하여 군자동에 편입되었다.
이비당골
장한의원에서 군자동으로 오르는 계단길에서 중앙동과 군자동 경계의 사거리를 말한다.
군지장
진남관뒤의 줄다리기 하는곳을 군지장이라 한다.
충무동[(忠武洞) 큰샘골·육동(陸洞) 서정]
조선조 초기부터 종고산 서남부와 북부구능지대에 형성되는데 1913년 바다였던 지역을 매립하여 육동(陸洞)이라 하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개핀에 의하여 종동, 석정,천동, 포동, 상정, 하정, 석교리, 교통, 추동, 탕암, 구동, 성동, 연등을 서정(西町)이라고 부르다가 1946년 왜식동명을 폐명하고 이충무공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 때문에 충무동으로 고쳤는데 1953년 행정구역 변정에 따라 육동(陸洞)을 합하여 충무동(忠武洞)이라고 한다.
연등동[(蓮燈洞) 동정(東町) · 연등]
연등천이 흐르는 여수시의 서편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장군산을 마주하고 있고 동북쪽에 있는 종고산 중턱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시내 중심으로 통하는 관문이고 충민로, 광무로, 구국도를 끼고 있다. 그리고 연등동은 고려때 부터 외지에서 여수시로 오고가는 모든 교통량이 연등의 외길을 통하여 시내외를 연결해준 통행로라 하여 연등으로 명칭 된 것이 조선조 중엽에 지금의 수도가압장 부근에 여승이 암자와 연못을 만들어 연꽃을 등불처럼 화려하게 장식하여 왔다하며 당시 이곳을 통행하던 고명도사가 화려한 연꽃광경을 보고 연등을 연등동으로 개명하며 선남선녀가 많이 출세하고 연등부락이 크게 발전 할 것이라 하여 연등동으로 하였다 한다.
지금은 사적지나 연못 흔적은 찾을 수 없으나 그동안 많은 인재가 배출되고 그 주변 일대가 주거지로 날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연꽃이 물에 뜬 형국이므로 연등이라 하였다 하는데 1914년일제의 행정개편으로 종동, 석정, 천동, 포동, 상정, 하정, 석교리, 교동, 추동, 탕암, 구동, 성동을 병합하여 동정이라 하다가 1946년 왜식 동명변경에 따라 연등구역을 갈라서 연등동이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