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동 지명유래

구항(舊港), (여수항)

중앙동 남쪽에 있는 옛항구로 수정동에 신항이 있음.

남문밖(남문외, 남양동)마을

남문터 밖에 있는 마을.

남문터(南門-) (진남문터, 진해루터, 만노문터)

중장동 남쪽으로 바닷가에 있는 진남루의 문터.

남양동(南陽洞)마을

남문밖

장군도(將軍島), (대섬 죽도)

중장도 남쪽에 있는 작은섬으로 연산 3년(1497)에 수사 이량(李良)장군이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군도와 여천군 돌산면 우두리의 백초사이의 바다목을 돌로 메워성을 쌓고 장군성비를 이 섬에 세웠으며 그 후손들이 방왜축제비를 세웠는데 삭아 없어지고 다시 세웠음.

방왜축제비(防倭築堤碑)

중앙동 1번지에 있는 이량장군의 방왜축제비로 본래 인조 21년(1643)에 그의 5대 배원이 글을 짓고 6대손 필(泌)이 글씨를 써서 강군도에 세웠던 것인데 돌이 삭아서 없어지고 숙종 365먼(1710)에 8대손 삼()이 이곳에 새로 세웠음.

수장끝(水墻-),(수장단 ·수장동)마을

중장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숙종때 수사 윤하(尹河)가 여수항의 큰 물결을 막기 위하여 바다에다 길이 약 1,200자, 높이 7자 되는 담을 돌로 쌓았는데 1924년에 그 안쪽을 메워서 마을이 됨.

농구정터(弄龜亭- )

남문밖에 있는 농구정의 터

만하정터(換河亭- )

남문터

수중석성(水中石成)

장군성

여수시민극장(극장)

중장동 서쪽에 있는 극장

장군도공원(將軍島公園)

장군도에 있는 공원. 1914년에 벚꽃 1,000주를 심어 공원을 이루어서 매년 4월초에는 꽃이 피고 있는데, 꽃의 아름다움보다도 일제의 국화이니 그 시절의 나라 빼앗긴 치욕을 생각해야 한다.

중앙극장

중장동 남쪽에 있는 극장

중장동(마을)

중앙동

진남문터(鎭南門-)

남문터

진해루(鎭海樓)

남문

통샘골(마을)

중장충 북쪽에 었는 마을로 통샘이 있었음.

고소동 지명유래

고소대(姑蘇臺)

고소대 마을

고소정터(姑蘇亭ㅡ)

고소대에 있는 고소정 터 를 말하며 임진왜란때 이충무공이 작전 명령을 내렸던 장소로 지금도 이곳 땅을 파면 숯과 소금이 나온다 한다.

대첩비(大捷碑)

고소대에 있는 비석으로 광해 7년(1615)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기리어 서문밖 동령고개(동산동)에 세웠는데 1942년 일제가 타루비와 함께 갖다가 경복궁 근정전 앞마당에 깊이 묻은 것을 해방후 1946년 지방민인 김우평(金宇坪)씨가 당시 미군정청 안재홍(安在鴻)씨와 김중태(金重泰)씨 등의 도움으로 1947년에 파 옮기었음.

기실비(紀實碑)

대첩비 건립 내용을 적은 비문터를 말함.

충무정(忠武亭)(사장)

계산 북쪽에 있는 정자로 1951년 10월에 세워 궁술을 닦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기리어 충무정이라 함.

개장골

충무정 밑에 있는 마을

앙사재터(養士齋ㅡ)(별포청터)

고소대 밑에 있는 양사재의 터로 본래 별포청(別咆廳)인데 광무(光武) 5년(1901)에 중수하고 "양사재"로 바꾸었음.

윤관찰사 생사당터(尹觀察使 生祠堂ㅡ)

고소대에 있는 관찰사 윤웅렬(尹雄烈)의 사당터로 갑오 동학란(1894)때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한 공적을 기리어 그가 살아있을 때 사당을 세웠음.

사장(射場)

충무정(忠武亭)

소동(蘇洞)

고소동(姑蘇洞)

고소동 노거수 당산제(堂山祭)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에 충무공 비각안 노거수(老巨樹)앞에서 당산제를 모셔오다가 1968년부터 당산계의 해산으로 중단되었으며 본 비각에서는 공()의 탄신일인 4월 28일과 전몰일인 음력 11월 19일 제()를 모셔오다가 요즘에 와서는 탄신기념식은 충민사에서 거행하고 전몰추도식만은 본 비각에서 거행하고 있다.

교동 지명유래

신교동(新喬洞)마을

교동 동남쪽에 바다를 매립하여 새로 생긴 마을

병모가지(마을)

교동(喬洞)

구봉교(九鳳喬)

교동 서쪽에 있는 교량

중앙시장

교동 가운데에 있는 상설시장

탕수바구(湯水岩)

현 남도여관 입구에 거대한 암반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겨울에는 따뜻한 온천수가 나왔다고 한다. 현재 군자동(君子洞)의 온천과 일맥 상통한 지형(땅)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