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현황표로 면적, 가구 및 인구, 행정구역, 공무원 ,주요기관, 문화재 항목으로 구성된 표
면적 6.02㎢(대지 0.81, 농경지 1.91, 임야 2.56, 기타 0.74), 섬 2(장도, 두력도), 해안선 2.6㎞
가구 및 인구 15,741세대 40,839명(남 20,492 /여 20,342) * 2022. 7. 1. 기준
행정구역 3개 법정동, 80개통 625개반
공무원 정원 23명(공무원 현원 22명)
주요기관 27개소(공공기관6, 학교5, 파출소1, 금융기관10, 병원2, 중대본부1, 문화레저시설 2)
문화재 선소유적(국가사적 제392호), 오충사ㆍ이충무공 자당기거지(여수시문화유산)

지역특성

  1.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나라사랑과 부모공경의 얼이 숨 쉬는 충효의 고장
  2. 계획적인 택지개발지구 웅천 신도심과 구도심이 공존하는 여수 제1의 중심
  3. 문화예술공원 ‘예울마루’와 ‘장도’ 개발로 전남동부권 문화예술의 메카

마을연혁

  • 1897년 : (조선 광무 원년) 여수군 설치
  • 1931년 : 여수군 여수면이 여수읍으로 승격
  • 1949. 8. 13. : 여수읍이 여수시로 승격, 여수군이 여천군으로 개칭(쌍봉면)
  • 1976. 9. 1. : 여천지구출장소 개소(쌍봉면)
  • 1986. 1. 1. : 여천지구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시전동)
  • 1998. 4. 1. : 통합 여수시 개청(시전동)

마을역사

시목

고려초기 제염을 했거나 선박 및 화물수송업무에 종사하는 계급들이 살았던 조해소(調海所)가 본마을에 있었다하는데 1789년을 기준으로한 호구총수에는 선소만 지명이 보이고 시목이나 기전은 보이지 않았다. 1905년의 현내면 때에 시목(枾木)이란 마을명으로 등장하여 현내면 30개동을 구성하였고 1908년에는 시목리가 되어 쌍봉면 40개리를 만들었다가 1914년 들어서 이웃 선소, 기전과 같이 시전리로 개칭되어 28년동안 같이 묶여있다가 1942년에 1,2,3구로 분활되었는데 본 마을은 시전 1구라 칭졌다. 1961년 3월에 잠시 시전리로 통합 되었다가 1962년 다시 분구 되었는데 이때는 구()가 아니고 기존 자연 부락 명칭에 리()가 붙은 것이 특징이었다. 본 부락의 택지조성 사업은 토지개발공사에 의해 추진됐고 1981년 3월 21일 처음으로 가옥2동이 철거된 것을 시작으로 1989년 9월 30일자로 잔여세대가 완전철거된 것이 택지조성 사업실적 대장상의 기록이다.

기전(基田)

1905년에는 기동(基洞)이란 지명으로 현내면의 30개동을 구성하였고 1908년에 기전리(基田里)로 등장 쌍봉면의 40개리를 만들었다가 1914년 들어 선소리, 시목, 기전리가 합하여 시전리(枾田里)로 개칭하고 쌍봉면의 11개 법정리동을 구성하였다. 1942년에는 1,2,3구로 분리됨에 따라 시전2구가 되었다가 1961년 3월 30일 시전리로 통합되었으며 1962년 다시 기전리, 시목리, 선소리로 분리 되었다. 1977년 10월 26일 전남고시 제38호에 의거 신도시개발을 위한 택지조성지구에 본 마을이 편입되어 1981년 3월 21일부터 1989년 10월 27일까지 전체 마을이 철거 이주하여 옛모습을 찾아 볼 수 없게 됐으며 지금 제일모직사택 일원이 옛터전이었다.

선소

거북선의 건조 사실을 감안한다면 본 부락의 역사는 오래일 것이고 그 이전의 이름도 있었을 것이나 전해지지 않고 1895년 5월 26일 남원부 순천군 여수면(呂水面)이 탄생했다고 하는 바 (김계유), 1789년을 기준으로한 호구총수에 여수면(呂水面 하도) 17개리에 선소려(船所閭)라는 지명으로 본 마을이 나타났다. (김병호) 1905년의 현내면 시절에는 이마을의 지명이 보이지 않다가 1908년 쌍봉면 시절엔 선소리(船所里)로 등장하여 쌍봉면의 40개리를, 1914년에 들어 선소리, 시목리, 기전리가 합하여 시목리로 개칭하고, 쌍봉면의 11개 법정리동을 구성하였다. 1942년에는 시전리를 1,2,3구로 나누어 1구는 시목, 2구는 기전, 3구는 선소가 되었으며 1961년 3월 3일엔 1,2,3구를 통합하여 리장을 선거하였던 바 1구의 김태용이 당선되고 유급리 서기로는 2구의 서경묵이 임명되었다. 1962년엔 다시 시목리, 기전리, 선소리로 분구됐으며 1986년 1월 1일 시개청과 더불어 시전동 1통으로 개편됐다. 1930년대를 전후해서 아랫장이 폐쇠될 때까지 본마을은 60여호 이상의 큰동네 였으나 지금은 전항의 현황과 같으며 유적지 보존지구로 개발이 제한되고 있다.

신기

본래 시전부락은 여수군 쌍봉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선소, 시목. 기전을 병합하여 시목, 기전부락 이름을 따서 시전이랬으나 1978년에 배후도시 건설로 인하여 모두 철거 이주함으로써 시목부락으로 변경되어 운영하고 있다. 학용리도 78년도에 철거되여 당시 마을은 없어지고 새로운 마을이 형성

모전

입향 선조는 김영김씨 김광옥씨로 기록되다. 김광옥씨의 선조 신라 경순왕의 8세 김시흥의 후예 10대손 김준이다. 서기1426년경 이조 세종시대 대광보국 승록대부 영둔 부사 관직을 지낸 김영김씨 영돈공 김준의 후손이며 김주서의 아들로서 통훈의 품계까지 올랐던 분이기도 하다.김준의 7대손 통훈매부 김광옥께서 사헌부 관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여 전라좌수영에 근무하다 노령으로 퇴직하고 고흥 점암면 모동에서 생활하다 서기 1570년경 이곳 모전으로 분가하여 왔다. 그의 후손 14대 후예들의 이 마을에 살고 일부는 여수시내에 거주하고 있다.

웅남

웅남이란 마을은 웅천 남쪽에 있다고 하여 남촌 또는 웅남이라고 했다. 이 마을은 내, 고음천, 곰챙이로 부른 마을의 남쪽예 있는 웅남부락이다. 경주김씨 김종갑씨가 1630년에 부친 김경록과 함께 살다가 여수시 허문마을에서 고음천 웅남부락에 분가하여 첫 입향하였다 달성서씨 서후노씨가 고음천에 1592년에 입향하였으나 그의 후손들이 이 마을에 대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남평문씨 문응지씨가 본 마을인 고음천에 1592년에 입향하였으나 이분의 후손들이 분가하여 웅남부락에 세거하여 살고있다. 창원정씨 정계생씨가 본 마을인 고음천 송헌에 1519년에 입향하였으나 그의 후손들이 웅남, 웅동, 웅서. 가곡 여천시 일원 여수시등에 세거하여 살고있다. 전주이씨의 입향조는 미상이나 현재 거주하는 후손은 이상재씨가 살고 있다. 청주 씨도 입향선조는 미상이나 후손만이 살고 있는데 후손은 한상균씨이다. 여흥민씨도 입향조는 누구인지 모르나 후손인 민병주씨가 살고있다.

웅동

웅동마을은 동촌이라고 부르며 수룡골 무룡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웅동부락은 당초에 고음천이란 지명이었다. 원래 웅천을 고음철, 고음내, 곰챙이로 불러왔으나 마을의 번창과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송현. 모전, 웅서. 웅남을 병합하여 웅친이라 지명이 되였다. 대개 웅천이란 현지명을 고음천의 지명을 풀이하면 (깊은 뜻으로 표현하면 곰웅() 자를 웅천이라고 이용하였다.고음천의 입향조는 장원정씨 정계생씨이다. 이분의 자는 덕택이고 호는 월친이다. 월호군 행방의 후손이며 진사 자린의 아들이다. 중종을 을사(乙巳)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벼슬까지 올랐으며 을묘사회를 맞아 임금께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드여지지 않자 남원에서 이곳으로 낙향하여 살았다. 그후 사후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이분의후손들은 대거 쌍봉등지와 여수시에 살고있다.

웅서

고음천 웅서부락은 중종때 정계생 창원성씨가 입향한 곳이 송현이다. 그의 후손인 철씨가 이곳으로 분가하여 살게되었다. 충절공 정칠씨는 임진왜란때 이충무공의 막히서 공을 세운 창원정씨로서 정계생의 2대손이다. 이분들의 입향은 웅동과 송현으로 기록 되었다. 남평문씨 문응지씨는 충선공 문익섬의 후손이며 부사 문복의 아들이다. 병절교위를 지냈다. 보성에서 입향 그 후손이 응천동에 기거하고 있다. 달성서씨 서후노씨는 정평공 서구형의 후손이며 문계입의 아들이다. 중추원을 지냈다. 현재 후손들이 웅천동 각동에 분거하여 살고있다. 경주김씨 김검씨는 김자졸의 후손이며 김두검의 아들이다 선조때 충청남도에서 웅천 웅동으로 낙향하였으며 후손들이 세거하여 살고있다.

송현

송현 마을은 약600여년전쯤(1380년경)에는 이 마을을 고음천으로 불렀으며 그후 세천이 흐름에 따라 이 마을에 제일먼저 입향조는 창원정씨 정계생 중시조가 입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경상남도에서 창원 정씨가 들어오기 전에도 원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그 후예들은 후손이 없어 대가 끊기고 그후 정써가 입성 했는데 이곳에서 정자의 손자인 정철, 정인. 정춘의 충신들 후손은 웅서. 웅남. 웅동으로 이거해 갔으며 손이며 4대손인 정대수 충신이 이 마을에 잔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정씨 문중의 입초 입향조는 송현에 입성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다른 후예들은 웅서에 먼저 입향하였다고 하는분도 있다.

정계생의 중손정대수 후예15대손인 정송수(定宗洙)씨가 여수 항 또는 성균관 전학에 상무이사직을 결하고 있다. 또한 정철 후예인 정각용씨의 자 정 흥씨는 새마을협의회장을 지낸바 있으며 정춘의 후예 손은 여천시 가곡마을에 기거히 정춘의 후손 정채욱은 통일주최 국민희의 대의원 또는 선거인단과 평화통일 정책자문의 위원(여천시 지부)직도 겸하고 있다. 정채호씨는 전남 요트협회장과 고려상호신용금 고 이사장직을 겸하고 있다. 정인의 후예는 숭주군 낙안에 기거하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충무중 모친 변씨 부인이 이 마을에서 5년간(1592~1597) 임진왜란을 피한곳 이기도 하다. 이때 이충무공 모친 변씨 부인이 이곳에 오시게 된것은 당시 충무공 막에 정대수라는 수군이 근무하고 었었는데 정대수씨는 편모를 극진히 모실뿐만 아니라 효자라는 소문이 나있어 이댁을 충무공께서 방문하여 본즉 소문과 다름 없으며 양반가 으뜸인것을 알고 모친을 이곳에 머물게 하여 정대수 모친과 같이 임란을 피차게 할수 있도록 하였으며 여수 본영에서 아침 저녁 말과 배를 이용하여 어머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으며 또한 한산대첩 때도 틈이 있을때마다 이곳에 와서 어머님께 문안을 드린것이 5년이 넘었다. 하루는 이별을 고하며 어머님께서 말씀 하시길 "진중에 잘 가거라. 국가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하시고 두 세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석별의 말을 하지 않으셨다. 난중 일기에 기록된 내용임.

이댁의 아들인 정대수가 출병하여 적군에게 적탄을 맞고 전사하고 조정에서는 정대용에게 충정공의 호를 내렸으며 증병조 판서를 하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시대 관직을 지낸 창원정씨 행방의 후손인 월천공 정계생 자는 덕해, 호는 월천이다. 상호군 행방이 후손이며 진사 자인의 아들이다. 중종 을사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시조좌랑 벼슬까지 올랐으며 을묘사화를 맞아 임금님께 상소문을 올렸으나 받아드러지지 않자 낙항하였다가 사망하였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쌍봉 웅천동에 신도비가 세워져있다. 전북 남원에서 생활하다가 중종14년 1519년 을묘사화때 이곳 고음천(순친부 원촌협 솔개 (송현))으로 이주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