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려 말 정지의 함대가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
<관음포>
역사적 배경
고려 우왕 초기 바다에서는 나세(羅世)·최무선(崔茂宣) 등의 진포대첩, 그리고 내륙에서는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왜구의 기세가 일단 진압이 되었다고는 하나 바다를 넘어다보는 왜구는 쉽사리 근절되지 않았다.
경과
1383년(우왕 9)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 1347~1391)는 그의 함대를 거느리고 나주·목포 일대를 경비 중 합포(合浦: 지금의 마산) 원수인 유만수로부터 왜구가 120척의 배를 이끌고 침입해 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항진(航進)하였다.
정지는 여수반도에 이르러 전열을 가다듬고 섬진강 어구에 이르고 있던 차에 왜구가 이미 노량목의 관음포에 집결하여 있음을 알고 작전을 세우는 한편, 지리산에 병사를 파견하여 지리산신에 “나라의 존망이 이 싸움에 있으니 원컨대 저로 하여금 신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라는 기도문을 올리자 지금까지 내리던 비가 개었다 한다.
또 정지가 뱃머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니 풍향이 갑자기 변동하여 정지 함대에게 유리하게 불어왔다고 한다. 곧바로 적선을 찾아 나선 정지의 함대는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왜구의 배들과 맞닥뜨렸다. 왜구는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큰 배 20척을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정지는 앞서서 공격하는 배를 격침시킨 다음 화포를 사용하여 그 가운데 17척을 대파하였다.
결과
고려군의 함재화포의 위력에 왜구 선단의 선봉선대 17척이 분멸됨으로써 관음포해전은 장렬하게 막을 내렸다. 관음포대첩은 승리를 거둔 뒤 정지가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하였으나 오늘같이 쾌한 적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왜선을 철저히 격파한 해전이었다. 이 때 왜선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던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方之用)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다. 왜구는 이 해전에서 17척의 큰 배를 잃은 외에 2,00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전의를 상실한 채 퇴각하였다.
의외의 평가
여수반도 동쪽에서 이뤄진 관음포해전의 공은 우선 정지의 애국심에서 우러난 진두지휘에 있다 할 수 있으며, 정지의 탁월한 전략 전술과 함께 함재화포의 활용으로 대량 살상을 할 수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관음포해전은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킨 승전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여천시지] (여천시문화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