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의 종착지

  • 임란해전 전투 그림
  • 바다위에 거북선이 떠다니는 그림

이충무공의 생애 가운데 장수로서의 덕과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구국제민의 뜻을 편 때가 전라좌수영과 인연을 맺은 8년간(1591~1598)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8살(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우리 수군의 활약으로 전세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49살(1593년 8월)에는 조정에서 전라 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권한을 많이 주어 활약케 하였 으나 53살(1597년 3월)에는 왜군과 원균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백의종군의 억울함도 당하기도 하였다.

53살(1597년 8월)에는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 으며 54살(1598년 11월)에는 순천 왜교로 후퇴한 소서행장의 퇴로차단작전을 명나라 장수 진린과 더불어 강행하던 중 1598년 11 월 19일 미명에 여수반도 건너편 남해도 관음포 앞바다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 판옥선 선소 전경판옥선 선소
  • 벅수 푯말 앞에 큰 돌이 나란히 있는 모습벅수
  • 굴강 전경굴강
  • 선소 풀뭇간 모형선소 풀뭇간

거북선 건조지

선소

판옥선, 병조선, 전투선, 맹선등을 제작하고 수리한 조선소임. 소재지는 여수시 시전동 708번지 일대

  • 선소는 굴강 뒤로 가덕도와 장도가 천연의 방파제로 사용 "外海서 보면 육지요, 內海서 보면 바다"이면서 파도가 잔잔하여 호수와도 같은 천연의 요새임
  • 유적으로는 배를 정박시켰던 굴강을 비롯하여 무기 제작처로 추정되는 대장간(풀무간)-세검정-군기창고등의 터가 남아 있고, 마을 입구에는 벅수가 세워져 있다. 병사들의 훈련장과 적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천연적인 요새인 망마산이 주변에 있다.
계선주

석암으로 1592년 제작되었고 야간에 경비병 역할을 하고, 주간에는 거북선을 메어 두는 기둥으로 사용

벅수

돌로 깍아 세워 둔 일반인을 금한다는 경계표시와 굴강 입구, 일반인이 다니는 오솔길등 3 곳에 6기가 세워져 있다.

망마산 동백말채

이 충무공께서 임진왜란시 수군과 기마병을 훈련시키면서 산정상에 꽂아둔 동백말채가 살아 자라고 있다. "동백말채가 살아 있으면 나의 영혼도 살아 있는 것이요, 이 동백말채가 죽어 있으면 나의 영혼도 죽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겼다는 전설이 있다.

굴강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 충무공께서 거북선과 판옥선(총지휘선)을 건조, 이 곳 앞바다에서 진수한 곳이기도 하며, 1980년 해군사관학교와 1985년 명지대학교에서 각각 발굴 조사한 결과 철촉등 565점의 유물이 출토(1차:113점,2차:452건)되어 국립광주박물관에 보관중에 있다.

  • 유물 : 철촉 20점, 철정 54점, 철환 3점, 철편 15점, 동선 7점, 치아 2점, 벼루 2점, 노편 2점, 청자 및 회색백자 392점, 평와편 14점, 기타 54점
  • 규모 : 직경 42 m (거북선 2척 규모, 대피 및 건조기능)
효의 실천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본가는 부인께 맡기고 77살의 노모(변씨부인)을 아산에서 전라좌수영 근교 古音川(현 여수시 웅천동 송현부락)에 모셨다. 이곳은 본영에서 20리 남짓하여 노모의 안후를 살피기 쉬운 거리인데다 충무공의 군관으로 있는 정대수장군댁 초당인지라 안심하고 모실 수 있는 곳이었다.

장군의 난중일기중에서 노모에 관한 기록은 88일분을 남기고 있어 그의 효성을 짐작할 수 있다. 임란 3년째 갑오년 정월에는 노모와 설을 같이 지내며 "어머님을 뫼시고 함께 한 살을 더하게 되니 이는 난리중에도 다행한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모친 생신때 전쟁중이라 직접 가뵙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음을 기록에 남겼다.

특히 그가 모함에 빠져 투옥된 뒤 노모가 고음천에서 소식을 듣고 선편으로 아산 고향으로 올라오는 도중에 풍랑조차 만나 고통 끝에 82살로 숨을 거두었을 때 이 소식을 들은 공의 애달픈 마음, 그러나 금부도사의 재촉에 못이겨 백의종군길을 떠나야 했던 공의 심정은 난중일기를 읽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국가사적 1호

여수의 충민사는 이충무공 순국 3년 뒤(1601년) 우의정 이항복이 사당 건립 제안하여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의 주관하에 사당이 건립되고 그후 조정에서 사액하여 국립사당(서원)으로 된 것이다.

  • 두장의 사진으로 위에는 충민사 전경, 아래에는 정화 사적비충민사 전경과 정화 사적비
  • 고유제 비석고유제
  • 하마비 비석하마비

현 통영에 있는 충렬사는 순국 65년후(현종4년:1663년)에 사액된 것이며 현 아산의 현충사는 순국 106년후(숙종 30년 : 1704년)에 사액된 것으로 여수의 충민사가 국가적기념사업 제1호지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3곳 모두 사액서원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표가 될 1인을 1개 서원 이외에서는 향사하지 못한다는 원칙과 그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에 있다하여 통영의 충렬사만 남기고 충민사와 현충사는 철폐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광복후 1947년 충민사를 다시 세워 관리해 오다가 1993년 6월 1일 국가사적지(38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