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의 배경

전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회적 배경

1948년 2월 6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이 저지당함으로써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거의 확실해지자, 민주주의민족전선과 남로당은 2월 7일부터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반대 남조선총파업위원회의 명의로 전국적인 파업과 파괴, 시위, 동맹휴교 등을 선전·선동했다. 남로당은 남북연석회의의 결정에 따라 남조선단선반대투쟁 전국위원회를 각 시·군에 조직하고 선거 저지 공작을 2단계로 펼쳐나갔는데 선거 실시 전까지는 선거를 파탄시키는 투쟁을 전개했고, 선거가 실시되면서부터는 무효화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전남 동부 지역에서도 구례, 순천을 포함한 4개 군에서 5·10 선거 저지 투쟁이 발생하였다. 즉, 1948년 3·1절을 계기로 구례의 경찰지서 및 우익 습격 사건, 순천의 시위 군중과 우익 학생과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전남 동부 지방의 군중들은 점차 급진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5월 10일, 제헌 선거를 전후로 해서 더욱 활성화되고 있었다. 5월에 들어 3·1절에 격렬한 대규모 시위 양상을 보인 순천에서는 우익 테러로까지 발전하고 있었으며, 광양과 여수에서도 경찰지서와 투표소 습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한편, 해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들의 급작스런 증가와 미군정의 미곡 수집령 때문에 군정 당국에 대한 원성이 높아가고 있었다. 여수에서는 1948년 7월 하순부터 8월 상순까지의 2기분 배급을 주지 않아서 8만 여수읍민의 원성이 높은 실정이었다. 식량 통제를 목적으로 설립한 반관반민 단체인 식량영단 당국은 2기분 배급 식량을 찧어 분배하여야 하지만, 도정공장에서 이윤이 적다고 하여 도정을 하지 않아 여수 군민의 생계가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이러한 행정 당국의 실정과 더불어 1948년 7월의 수해로 각 지방에 이재민들이 무더기로 발생하고, 많은 재산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미군정기를 거쳐 1948년 8월 15일, 역사적인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선포로 한민족은 비록 반쪽이나마 일제 식민 통치와 미군정 통치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독립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승만을 수반으로 하는 제1공화국의 출범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국방경비대의 성격과 14연대

1946년 1월 15일, 제1연대 창설로부터 만들어진 국방경비대는 미군정의 대한 정책이 반영된 결과로 만들어졌다. 미군정에서는 원래 앞으로 세워질 국가의 군대 창설을 계획하였으나, 소련의 반대를 예상한 미국은 그 성격을 제한하여 ‘경찰예비대’로 약화된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국방경비대는 만들어질 때부터 향토 연대로 편성되었다. 미군정에서는 국방경비대 창설 계획인 ‘뱀부 계획(Bamboo Plan)'을 수립하여 각 도에 1개 연대씩 편성하였다.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면서 미군정에서는 특별한 제한이나 사상 검열이 없이 ‘불편부당·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국방경비대원들을 모집하였다. 때문에 국방경비대에는 다양한 세력들이 참여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만주군·중국군 등에서 군대 경력을 쌓았던 세력들이 참여하였고, 미군이 진주하기 전부터 사설 군사 단체를 조직·활동했던 세력들도 참여하였다.

제14연대는 1948년 5월 4일 광주의 4연대 1개 대대를 중심으로 하여 여수 신월리에서 창설되었다. 신월리는 일제 말기에 일본 해군의 항공기지가 있던 곳으로 미군은 이곳을 ‘앤더슨기지(Camp Anderson)’로 명명하고, 14연대의 주둔지로 사용했다.

한편, 4연대와 14연대에서는 경찰과의 물리적인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국방경비대는 무기지급, 계급장, 복장, 급식문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찰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있었고, 군대로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경찰예비대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경비대 간부 대부분은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이어서 군 우위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경찰을 무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게다가 친일 경찰이 다시 경찰이 되면서 군인들은 경찰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에 경찰 측에서는 경비대를 경찰 조직의 하부 기관쯤으로 보아 무시했고, 사상적으로는 불순하고 향토적 색채를 띠는 오합지졸로 인식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군과 경찰은 수차례 충돌을 일으켰고, 여순사건이 발발할 때 친일파경찰을 타도해야 한다는 슬로건은 사병들에게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여순사건의 배경

남한만의 단독 선거·단독 정부가 추진되면서 각지에서는 여기에 반대하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특히,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일어났으며, 미군정은 제주4·3사건 초기에 각도에서 경찰을 차출, 경찰을 동원한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4·3사건 초기에 경찰의 힘만으로 진압이 되지 않자, 진압 작전에 국방경비대를 동원하였다. 경찰은 해안 부근 마을의 치안활동을 담당한 반면, 국방경비대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렇듯 국방경비대의 토벌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한 저항이 제주도 모슬포 부근에서 발생하였다. 1948년 6월 18일, 초토화 작전을 지휘했던 제9연대장 박진경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제9연대 부대원 탈영 사건과 함께 동족을 살상하는 작전에 반대하는 국방경비대원들의 저항이었다. 박진경 암살 사건을 계기로 전군 차원의 사상검열이 이루어지면서 군 내부에 침투한 좌익과 동조자를 축출하기 위해 숙군(肅軍)이 시작되었다. 숙군은 각 연대별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숙군의 여파는 광주의 제4연대까지 미쳤고, 제4연대의 숙군은 제14연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른바 ‘혁명의용군사건’으로 연대장인 오동기 소령이 연루되어 구속된 후 남로당 세포 조직으로서 제14연대 독립대와 재정을 맡았던 이등중사 김영만이 4연대 근무할 당시 그의 세포 조직원이었던 제4연대원의 밀고로 10월 11일 체포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14연대 남로당 조직의 위기감은 높아지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제주도 파병이라는 문제가 놓여 있었다. 10월 15∼16일쯤, 여수우편국 일반전보로 ‘14연대는 10월 19일 20시에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제주도 출동 명령은 좌익들에게 ‘동포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일’과 ‘봉기’ 사이에 양자 선택을 강요했다.

여순사건의 전개
여순사건의 발발

1948년 10월 19일, 여수 제14연대는 제주도 출병을 위한 준비로 하루 종일 분주했다. 저녁 8시쯤 나팔소리에 따라 부대원들이 연병장에 모이자 지창수는 연단으로 뛰어 올라가 “지금 경찰이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지창수가 연설을 마치자, 미리 봉기 계획을 논의했던 남로당 세포원들과 대부분의 사병들은 찬성을 표시했고, 이를 반대한 하사관 3명은 그 자리에서 즉시 사살당했다. 봉기한 사병들을 제지하려던 장교들은 사살되거나 피신했다.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한 뒤, 여수인민위원회는 10월 24일자로 「여수인민보」를 발간했다. 이 신문에는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가 작성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서가 있다. 이 글은 14연대 군인들이 봉기한 이유를 가장 명확히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목적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 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게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 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분단 정권을 거부하고 독립된 통일 조국을 위해 투쟁에 나선 제주도민을 죽이러 가는 파병을 거부한다는 주장은 군인 봉기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봉기가 일어나자 탈출한 박승훈 연대장조차 기자회견에서 14연대 병사들 대부분은 제주도 출병을 희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제주도를 전남과 같은 지역권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서도 제주도 파병을 거부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인민위원회

14연대는 여수를 점령한 뒤, 가장 먼저 인민위원회를 읍사무소에 설치했다. 아침부터 여수의 도심지인 중앙동 근처에는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성명서’, ‘여수 인민에게 고함’, ‘여수인민위원회 성명서’ 등과 인민대회를 알리는 벽보가 붙었고, ‘미군 철수’, ‘토지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도 나붙었다. 인민위원회 의장단에는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5명이 뽑혔고, 의장에는 이용기, 보안서장에는 유목윤이 선출되었다. 여수 인민위원회 위원장인 이용기는 취임사에서 여섯 항목의 정책을 발표하고 그에 따라 행정을 펼쳤다. 14연대 군인들은 시민들에게 해방군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순천에서도 14연대 군인들이 시내를 점령한 10월 20일 밤, 여맹과 민청이 지하에서 나와 간판을 걸었고 인민위원회도 재건되었다. 순천에서는 이날 밤, 인민군 사령부와 순천군 내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의 연합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대표로 순천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남로당을 비롯한 대중 단체들은 지하 활동을 끝내고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로당원들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여 식량 배급과 친일파, 민족 반역자, 반동 세력 처단 등의 기초적인 행정을 시작했다. 봉기 대중에게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모리 간상배들이 추진한 단독정부였고, 은행 예금은 이들이 인민의 기름과 피를 빨아 모은 것에 불과했다. 많은 경찰들이 사복을 입고 도망치거나, 붙잡혀 참혹하게 살해당하고, 여수의 유명한 자본가였던 김영준과 우익 청년단장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사실상 체제 질서 파괴행위였던 것이다.

여순사건의 전개 과정

여순사건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제14연대 병영에서 봉기한 병사들은 곧바로 여수경찰과 철도경찰을 물리치고 여수를 점령하였다. 그 뒤, 지창수의 지휘 아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600여 명의 병사들이 여수역에서 5량의 기차와 차량을 강제로 거두어 10월 20일 오전 9시 20분, 순천으로 이동하였다.

10월 20일 아침, 순천에 도착한 봉기군은 순천에서 경찰과 교전한 뒤, 이날 오후 순천을 점령하였다. 이때 순천에 파견되었던 14연대 일부 중대는 선임 중대장인 홍순석의 지휘 아래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순천을 점령한 뒤 1,000여 명 정도의 봉기군은 남원을 향해 북진하였다.

10월 20일 오후에 순천 북쪽으로 전진한 봉기군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정부군의 저지를 받았다. 정부군은 이정일이 지휘하는 제4연대였다. 이곳에서 2차례의 교전 끝에 정부군의 저지선을 뚫지 못한 봉기군은 다시 순천 일대로 퇴각하였고, 순천으로 돌아온 봉기군은 김지회의 지휘 아래 주변의 곡성, 보성, 구례 등지로 흩어졌으며, 10월 21일 이후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강력하게 전개되자, 이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10월 21일, 여수에 남아있던 14연대 병사 일부는 광양 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진압 부대가 제2차로 여수를 공격하기 앞선 10월 24일 밤 5시경이 되자, 백운산과 벌교 쪽으로 물러났으며, 14연대의 주력이 떠나간 여수 지역에는 지역민들만 남아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에서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육군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였으며, 송호성은 특별기편으로 10월 21일 오후 1시, 광주에 도착하였다. 10월 22일, 이범석은 “반란군에 고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0월 20일, 진압 작전이 시작될 때는 3개 연대를 동원한 작전 계획을 세웠다.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정부군의 진압 작전에는 총 5개 연대의 10개 대대와 경비행기 10대로 구성된 1개 비행대, 해안경비대 함정 등이 동원되었다.

여순사건 진압 작전에는 총 140명의 장교와 4,700여 명의 군인들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봉기군의 저항이 강하자, 정부군의 진압 작전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기 때문에 10월 21일, 진압 작전은 다시 조정되었다. 광주의 제4연대는 서쪽으로부터 여수를 포위, 전주 제3연대는 대전의 제2연대와 협력하여 북쪽으로부터 여수 포위, 군산의 제12연대는 여수의 북서쪽을 향해 군산을 출발하고, 부산의 제5연대는 바다로부터 포위를 유지하며, 대구의 제6연대는 여수의 북쪽 산맥을 횡단, 마산의 제15연대는 여수의 동쪽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정부군의 진압 작전은 여수를 중심으로 사방을 포위하여 봉기군을 섬멸하는 압박 섬멸전이었다.

10월 27일, 정부군은 여수를 탈환함으로써 여수·순천 지역의 진압 작전은 마무리되었고, 이때부터 정부군의 작전은 남원, 구례, 백운산 그리고 지리산 지역의 봉기군들을 소탕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미군의 역할

정부군의 진압 작전에는 주한 미군의 지원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주한 미군 제24군단 정보참모부 일일 정보 보고서인 G-2는 1948년 10월 20일 오전 9시 10분에 속보를 받았고, 10시 15분에 주한미군사령관은 지방 군사 고문단으로부터 여순사건을 확인하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이날 오전, 주한미군사고문단장인 로버츠 준장 사무실에서 로버츠, 이범석, 송호성, 하우스만, 몇몇 참모들이 모여 회의를 가졌으며, 이 회의에서 전투사령부의 설치를 결정하였다. 그 뒤, 리드와 하우스만을 비롯한 미군 고문관들은 정부군의 진압 작전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기 진압이 실패로 돌아가자, 10월 22일 퓰러 대령을 추가 파견하는 등 진압 작전을 적극 지원했다.

리드와 하우스만은 사령부에 배속됐는데, 이들 외에도 각 연대에 파견된 미군 고문관들은 고문의 역할을 넘어서 진압 작전에 적극 개입했다. 당시 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하우스만의 회고처럼, 미군은 탄약·무기·식량을 비롯해 통신수단까지 제공하였다.

진압에 참여한 주요 지휘관들의 성향

진압에 참여한 연대장급 이상 지휘관들은 송호성 준장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다. 특히, 제5여단장 김백일·제3연대 부연대장 송석하·제15연대장 최남근·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등은 모두 만주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모두 일제가 1939년 8월에 항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창설한 간도특설경비대에 소속된 한인 군관 출신이었다.

이들 중에서 제15연대장 최남근은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중도적인 입장에서 진압 작전에 적극 참가하지 않았고, 10월 22일, 광양 방면에서 봉기군의 기습에 포로가 됐다. 이후 그는 탈출한 뒤, 진압군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으나, 숙군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로 몰려 체포됐다. 그 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9년 8월 2일, 경기도 수색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총살당했다.

전투사령관인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10월 24일, 미평전투에서 보인 것처럼 용감하지만 능력이 부족한 지휘관이었으며, 여순사건의 진압 작전이 일단락된 이후 총사령관에서 면직됐다.

진압 작전의 실제 지휘관은 제5여단장 김백일 대령이었다. 그는 1945년 말, 백선엽, 최남근 등과 함께 월남해 군영을 졸업하여 임관한 뒤 제3연대장, 후방부대 사령관 등을 지냈다. 제3연대장 시절에는 비리와 가혹한 훈련, 남한 사람들을 무시하는 발언 등으로 인해 연대원들의 퇴진 시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만주군 대좌였지만, 군의관 출신인 원용덕 대령이 전투를 지휘하는 것은 무리이며, 모든 부대의 지휘를 김백일 대령으로 통일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던 채병덕의 판단에 따라 제5여단장에 임명됐는데, 만주군 시절에 항일 빨치산 토벌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중용됐다. 현지에서 초기 진압 작전을 지휘했던 장교들은 백인엽 소령, 제6연대장 김종갑, 제4연대 부연대장 박기병, 제5연대 1대대장 김종원처럼 과거 일본군 출신이나 만주군 출신 장교들이 중용됐다. 또한 이들은 대개 일찍부터 반공을 주장했던 극우 성향의 장교들이 주를 이루었다.

부역혐의자 색출

진압군은 수색 과정에서 기관총을 마구 쏘며 여수를 지키고 있던 세력의 저항을 제압하는 동시에 시민을 집밖으로 몰아내고 민가를 샅샅이 수색했다. 집안에 있으면 무조건 봉기군으로 여겨 쏴버린다고 경고하고는 주민들을 집 밖으로 내몰았다. 진압군은 봉기군으로 의심되거나, 조금의 저항이라도 보이면 사살했다. 진압군과 경찰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시민들을 모아놓고 부역혐의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인과 부녀자들을 운동장 모퉁이로 가게 한 뒤, 20∼40대 남자들에게는 옷을 벗고 속옷만 입게 했다.

부역혐의자 색출 과정을 목격한 미 군사 고문단원 대로우는 그의 보고서에서 여수에서 진압군의 주요한 목표는 ‘약탈’과 ‘강간’이었으며, ‘의심할 것도 없이 이 과정은 가장 난폭한 꿈이 이루어지듯이 진행’되었다고 적었다.

부역혐의자를 찾는 일은 여순사건에서 살아남은 그 지역의 경찰, 우익 인사, 우익 단체 청년들이 맡았는데, 이들이 가리킨 단 한 번의 손가락질이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사를 갈랐다.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이루어진 색출 때문에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부역혐의가 없는 시민이라도 운이 나쁘면 착각이나 개인감정에 의해서 죽음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다.

당시 심사의 기준이 된 것은 교전 중인 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흔적이 있는 자, 흰색 지까다비(地下足袋, 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주민들 가운데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사람도 봉기군으로 간주되었다. 흰 고무신은 지방 좌익 세력에게 처형당한 우익인사 김영준이 운영하는 천일고무공장에서 만든 것이었는데, 봉기 기간에 인민위원회가 이를 배급했기 때문이었다. 또 14연대 군인들이 입고 있던 군용 표시가 있는 속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혐의 대상이었다. 진압된 뒤, 겉옷은 버릴 수 있지만, 속옷은 갈아입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

이렇게 외모나 다른 사람의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중상모략, 강요된 자백 등의 기준에 의해 심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경우가 많았다. 단순히 당시 인민위원회에 출입했던 사람이나, 밥을 얻어먹으러 좌익을 따라다닌 사람 등 14연대 봉기 군인이나 좌익과 인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혐의를 받았다. 당시 ‘호박잎 하나라도 반란군에 준 사람’은 모두 혐의자로 몰렸다.

진압군의 부역혐의자 색출 과정은 12월 중순까지 약 한 달 반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로 인해 시내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손가락 총으로 상징되는 부역혐의자 색출은 같은 지역 공동체 성원 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역 공동체를 자연스럽게 붕괴시켰다. 부역혐의자 색출로 형성된 공포와 죽음 뒤에는 지역 공동체 성원들 간에 불신과 증오가 내면화되었다.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 또는 죽어야 한다.”라는 인식하에 실시된 진압군의 부역혐의자 색출은 작게는 여수·순천이라는 지역사회를 완전히 찢어 놓았다.

민간인 학살과 피해 규모

군과 경찰은 진압 작전 중인 경우에, 또는 탈출 또는 반항의 위험이 있다고 간주된 경우에는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상당수 즉결 처형했다. 군법회의는 재판의 형식을 띠었지만, 사실상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

증언에 따르면, 여수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서 법무관 4명이 재판을 했는데, 혐의자가 한 명씩 법무관 앞에 나와 각각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법무관 옆에는 경찰이 서 있다가, 혐의자가 앞에 가면 이름을 확인하고 대충 조사한 다음, 바로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재판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떤 법무관을 만나는가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곤 했다.

주한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는 한국군 장교들이 오전에 60∼70건을 판결하고, 오후에는 처형을 감독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연대장이 임명한 군인들로 구성된 군법회의는 되도록 사형을 선고하려고 노력했다.

시일이 지날수록 처형의 방식도 변해갔다. 처음에는 사형 집행이 총살형으로 이루어졌지만, 탄약이 부족할 때에는 죽창이 사용되었다. 사형 집행이 계속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사형에 임하는 병사들의 감각도 무디어져 갔다. 여러 번 죽창으로 찌르기를 반복한 병사들은 지쳐갔지만, 피곤한 줄도 모르고 제비뽑기를 하여 죽일 사람을 선택했다고 한다.

여순사건의 진압 작전 과정에서는 인명과 재산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했지만, 이에 대한 총괄적인 통계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지만, 그들의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과연 몇 명이나 희생을 당했는지에 대한 통계도 제각각이었다. 현재 인명과 재산피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정부 각 기관에서 작성한 몇 가지 통계에 불과하다. 당시 정부와 전라남도가 총 5차례에 걸쳐 조사한 기록이 있지만, 통계가 제각각이어서 여순사건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희생자에 대한 명확한 조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여순사건 희생자 통계

(단위 : 명)

여순사건 희생자 통계 정보를 조사기관, 조사기준일, 사망, 중상, 경상, 행불, 합계 목록으로 나타낸 표
조사 기관 조사 기준일 사망 중상 경상 행불 합계
전남보건후생국 1948. 11. 01. 2,633 1,028 488 825 4,974
정부 사회부 1948. 11. 20. 570 812 236 - 1,618
전남 사회과 1948. 12. 20. 1,441 - - - 1,441
정부 중앙청 1949. 01. 10. 3,392 2,056 - 82 5,530
전라남도 당국 1949. 10. 25. 11,131 - - - 11,131

또한, 진압군의 공격으로 발생한 시민들의 피해는 이에 비할 수 없이 막대했다. 길가의 집들과 주요 건물들에는 전투 과정에서 생긴 총탄 자국으로 벌집 뚫어지듯 상처가 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피해는 직접적인 전투 과정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압군이 시내를 장악한 다음에 피해가 발생했다.

여수에 진압군이 들어왔던 10월 26일, 목조건물이 많았던 여수 서시장과 27일 충무동 시민극장 주변에서 일어난 화재는 여수 시내의 중심가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서교동, 중앙동, 교동, 수정동이 완전히 불탔고, 공화동, 덕충동, 관문동은 일부가 불탔다. 이 지역이 시내 중심가였던 만큼 은행, 금융조합, 경찰서, 우편국, 토지행정처, 여수일보사, 금강·여수호텔, 여수극장, 각 병원 공장 등 각종의 근대적 건물들이 완전히 불에 타서 여수읍의 가옥 소실은 2천여 호에 이르렀고 피해액만도 100억 원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대응과 국가 폭력

여순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도 이를 숨기고 있던 정부는 이틀이 지난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 국무총리 발표를 통해 일반 국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국무총리 이범석은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는 포고문에서도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 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고 언급하였는데, 여순사건의 주모자를 혁명의용군으로 지목한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주장은, 내무부의 국회 보고에서 잘 나타나 있다. 사건의 배후는 ‘최능진, 오동기 등이 우두머리로 반란을 꾀한 혁명의용군과 좌익 계열의 선동에 관련됨이 확실’하다는 것이 내무부의 입장이었다.

이는 여순사건이 14연대의 봉기와 이에 따른 지방 좌익 세력 참여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 직후의 정부 대응은 권력에서 소외된 극우 정객과 공산주의자들이 합동으로 반란 사건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면서 김구와 한독당, 소장파 국회의원 세력 등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나 김구의 명백한 부인과 일반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자, 정부의 입장은 민간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으로 그 범위가 점차 변화하게 된다. 반란의 주체는 14연대 장병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조직된 민간 좌익들이라는 것이 발표의 요지였다. 이 발표는 정부 조직인 국군 내부로부터 반란이 처음 일어났다는 점을 애써 외면함으로써 반란의 초기 주체가 국군임을 부정하고, 그 책임을 민간인에게 떠넘기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진압이 완료된 후 11월 3일, 국방부는 ‘전국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벽보를 통해 여순사건이 이승만의 실정에 반항하여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소련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게 하여 여순사건의 주체에 대한 규정을 냉전적 설정으로 이동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월 4일, 담화에서 이승만은 불순분자 제거를 위해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린아이까지 일일이 조사해야 제거하라는 강도 높은 표명은 대통령의 직위에서 맞지 않는 고압적이고 강경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었다.

초법과 무법적인 상태의 계엄법과 국방경비법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10월 26일, 육군참모장 정일권 대령의 국방부 출입 기자단과의 회견에서였다. 계엄령은 순천에 대한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던 10월 22일, 현지 사령관에 의해 처음 내려졌다. 계엄선포문에는 ‘본관에게 부여된 권한’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중앙정부가 내린 것도 아니고, 현지 사령관의 판단으로 자의적으로 내려진 이 계엄령은 아무런 법적인 근거가 없었다.

국군이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고 여수에 대한 공격이 감행되기 시작한 10월 25일, 계엄령은 대통령과 국방장관을 겸임한 국무총리, 그리고 11명의 장관들이 참가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계엄령이 통과된 후, 호남방면사령관은 26일 여수·순천 지구에 임시 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당시는 계엄법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계엄법이 제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국무회의가 이를 ‘제정’하고, ‘의결’했던 것이다. 국무위원과 정부는 법률안을 제출할 수는 있지만,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다. 따라서 관보의 문구로 본다면 계엄령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었다.

그런가 하면, 공포된 적이 없는 국방경비법도 문제였다. 법령집을 보면 ‘국방경비법’, ‘해안경비법’은 1948년 7월 5일 공포, 1948년 8월 4일 효력 발생, 법률 호수 미상이라고 씌어 있다. 그러나 1948년 7월 5일에 이러한 법률이 공포된 일이 없다. 공포되지도 않은 국방경비법을 법률인 양 적용했고, 군법 피적용자인 군인과 군속 등은 물론, 국방경비법 제32조 ‘이적’, 제33조 ‘간첩’의 죄는 민간인에게도 적용되었다. 국민들은 이것이 법률인 줄 속아서 살아왔고, 많은 사람들이 그 법률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국방경비법’은 국가보안법뿐만 아니라 ‘사회안전법’을 거쳐 ‘보안관찰법’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법률에 인용, 계승되는 형태로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그래서 ‘국방경비법’에 의해 수십 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이 우리 주변에 살아남아 있고, 나아가 이들에게 보안 관찰 처분의 족쇄를 채우는 근거가 되고 있다.

여순사건의 영향

여순사건의 영향

여순사건의 정치적 영향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남쪽에 세워진 뒤 2개월 만에 일어난 여순사건은 1946년 미군정 하에서 일어났던 ‘대구 10월 사건’이나 1948년의 ‘제주 4·3사건’보다 훨씬 더 큰 정치적 영향을 남한 사회에 미쳤다.

특히, 반이승만 정치 세력에 대한 지배 정권의 공세는 여순사건을 계기로 급속하게 강화되었고, 한반도 남쪽을 지배했던 미군의 철군 정책도 변화되었다. 이러한 여순사건의 결과는 남한 사회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이승만 장기 독재와 군부 독재 정권의 창출이라는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첫째, 미군의 적극적인 개입과 영향력 확대로, 미군은 14연대 군인 봉기를 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48년 10월 20일, 국방부장관과 군 수뇌부와 함께 긴급회의를 가진 미군은 광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봉기 진압을 위해 최신 군사 장비를 지원하는 한편, 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정보 분야에서 국군을 ‘지휘’했다. 미군은 진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그 덕분에 여순 탈환 작전은 빠른 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14연대 봉기와 뒤이은 빨치산투쟁으로 미군 철수는 1949년 6월 말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둘째, ‘국방경비법’을 기초로 하여 현재까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국회는 반대파를 관제 공산당으로 몰아 처벌할 수 있다는 소장파의 우려와 강력한 반대를 뿌리치고 여순사건 뒤, 한 달 보름 만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1949년 1월부터 9월 말까지 형무소에 수감된 사람들 중 80% 이상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감되어 있었다. 국가보안법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반공 국가 유지의 가장 중요한 법적 제도이다.

셋째, 군대의 사회적 영향력은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정치적 영역에까지 확대 강화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여순사건을 통해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당시 전 병력의 ⅕인 5,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된 군사 합동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이를 통해 연합 작전의 경험을 익힌 국군은 국방경비대 시절 경찰에 억눌려 지내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경찰뿐만 아니라 전 사회에 압도적인 규정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반공 이데올로기 형성을 위한 대대적인 군대 내의 숙군 작업과 이를 통한 반공 군대를 조직하였다. 군인들이 반역적 봉기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이승만 정부가 즉각적으로 좌익 혐의 군인들을 숙청하고 군대를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시키는데 좋은 구실로 이용됐다. 숙군으로 처벌된 장병 숫자는 당시 전체 군 병력의 5%나 되었다. 그 틈을 메운 것은 청년단체로 이들은 1946년부터 반공투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던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인적 기반을 기초로 한국군은 한국전쟁을 거친 뒤에는 가장 강력한 반공조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여순사건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군대의 사회적 영향력은 곧바로 정치적 영향력으로 확대 재생산되어 이로 인해 이후 30여 년간 지속된 군부 독재 정권의 토대를 구축하게 되는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정치군인들의 쿠데타에 의한 군부 독재 정권이 그것이다.

여순사건의 사회적 영향

여순사건은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끼쳤는데, 먼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주민 통제 체제가 구축되었다. 여순사건을 철저하게 진압한 이승만 정권은 국제 공산주의 세력과 북한의 침략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11월 초에 극우인사들을 포함한 반이승만 세력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는 한편, 반공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주민 통제 체제를 하나씩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첫째, 1949년에는 가구 구성원 외에 다른 사람이 집에 머물면 경찰서에 반드시 신고하도록 하는 유숙계 제도를 실시했고, 좌익들을 선도하고 회개시킨다는 구실로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했으며, 1949년 1월에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호국군을 편성하여 4개 여단을 창설하였다. 각 학교에는 군 장교가 파견되어 준군사 조직인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학원을 병영화하였다. 이 외에도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 이후 학계, 교육계, 언론, 공무원, 사법계 등에 대한 대대적인 좌익 색출 작업을 계속 벌여 혐의자들을 쫓아냈다.

둘째, 여순사건의 성공적인 진압과 토벌은 이후 2년 뒤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자행된 100만 민간인 집단 학살의 서곡이 되었다. 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민간인 집단 학살이 여순사건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제주도로 이어져,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의 진압과 토벌 과정은 그야말로 진압군의 전과물로 획득되어 주민 학살이 경쟁적으로 악용되었다. 이로 인해 여순사건에서 나타난 유혈적 갈등과 민간인 학살의 양상은 2년 뒤 한국전쟁에서 그대로 전면화되었다.

셋째, 여순사건은 지역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지역 공동체의 파괴가 그것이다. 14연대 봉기군이 들어왔을 때에는 우익 인사와 경찰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고, 진압 작전 때에는 부역혐의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혐의자를 지목하여 처형하는 바람에 지역사회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나서면 다친다 = 죽는다.”라는 인식이 팽배해지면서 진보적 사회 운동의 싹은 잘려져 버리고 이데올로기에 일부러 냉담한 태도가 번졌다.

여순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아무런 재판도 없이 단지 14연대 봉기에 협력했다는 혐의만으로 초등학교 운동장이나 해안 절벽, 산기슭에서 죽어갔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왜 죽어야만 하는지도 분명히 밝히지 못한 채 수십여 년 동안이나 이 사실이 침묵 속에 묻혀 왔다는 사실은 민간인 학살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현대사 속에 깊이 각인된 구조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아무리 죽은 사람들이 죄가 없다고 해도 ‘빨갱이’라는 이유로 죽었다면, 어느 누구도 더이상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심지어는 여수·순천 지역 출신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얘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 국가 형성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남한의 반공 국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고정화되고 강화되었다. 여순사건과 이후의 한국전쟁은 남한사회가 작동하는 원형을 만들었던 것이다.

여순사건의 피해

여순사건 진상 규명의 현주소

유형별로 본 집단 학살

여순사건과 관련한 민간인에 대한 집단 학살은 해방 전후의 격동기 속에 해방 후 계급적, 민족적 모순의 해결을 둘러싸고 외세, 지배 세력과 민중과의 대립이 최고 수준에서 가장 적대적 형태로 폭발된 형태의 봉기군과 지방 좌익, 빨치산의 무장 투쟁에 대한 남한 정부의 토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연대기, 학살 주체, 피학살자, 학살 행위 유형으로 구분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민간인 학살의 연대기적 양상으로, 여순사건의 민간인에 대한 집단 학살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봉기군에 의한 학살, 진압군과 계엄 하에서의 집단 학살, 토벌 과정에서의 집단 학살, 그리고 국민보도연맹원과 정치범에 대한 집단 학살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봉기군에 의한 집단 학살 시기는 14연대 군인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 기간의 학살은 주로 경찰과의 교전 이후 여수와 순천과 같은 소위 해방구인 점령 지역에서 지역 유지들과 포로로 잡힌 경찰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진압군과 계엄 하에서의 집단 학살은 봉기군에 대한 초법적인 계엄령 발동의 진압 과정에서 아군인 진압군에 의해 자행되었는데, 이 기간의 학살은 주로 무차별한 진압 과정과 계엄 하에서 자행된 집단 학살로 무작위 다수의 민간인들이 이때 학살을 당하였다.

토벌 과정에서의 집단 학살은 진압과 계엄 상황이 끝나고도 산악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 봉기군과 지방 좌익에 대한 이른바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산악 부근의 마을 민간인들이 피아간의 공방에 의해 학살을 당하였다. 그리고 이 토벌 과정의 집단 학살 시기는 한국전쟁기로 그대로 이어져 갔다.

국민보도연맹원과 정치범에 대한 집단 학살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이 지역의 수많은 좌익 활동가들이나 정치범들에 대해 사상 전향을 종용했고, 대다수는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거의 다 집단 학살을 당하였는데, 애기섬(경상남도 남해군 소치도)의 120여 명, 대전형무소의 여순사건 관계 정치범 1,300여 명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후반기의 대표적인 학살이다.

둘째, 학살의 주체로 본 유형으로 우익 측에서는 국군, 경찰, 우익 단체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좌익 측에서는 14연대 군인들을 주축으로 한 지방 좌익으로 구별할 수 있다.

셋째, 피학살자들의 유형으로, 피학살자는 우익의 경우 군인, 경찰, 지역 유지뿐만 아니라 보도연맹원, 형무소 수감자, 부역혐의자, 공비 및 통비 혐의자, 불심검문 또는 가택 수색에 의해 뚜렷한 혐의도 없이 학살의 대상이 되는 주민 대부분이 대상이 되었다.

넷째, 학살 행위 유형별로 본 민간인 학살과 야만성이다. 학살 행위의 유형에는 총살, 생매장, 초토화 작전, 수장, 화형, 일본도에 의한 참살, 죽창에 의한 척살, 굶어 죽이기, 때려죽이기, 폭격이나 비행기에서의 기총소사 등이 있다.

또한, 피학살자별로 본 유형은 부역 혐의, 공비 및 통비 혐의 등 뚜렷한 혐의도 없이 학살의 대상이 되었으며, 지역별로는 사건의 진원지인 여수를 비롯하여 순천, 광양, 구례, 고흥, 보성, 화순 일부와 곡성 일부 및 경남 산청까지도 학살 대상 지역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여순사건 희생자 추정 대비 현황

단위 : 명, %

진실화해위원회의 여순사건 희생자 추정 대비 현황 정보를 구분, 추정, 신청, 확인, 비고 항목으로 구성한 표
구 분 추 정 신 청 확 인 비 고
여 수 1,300 111 8.5 126 9.7
순 천 2,060 205 9.9 258 12.5
광 양 563 43 7.6 64 11.4
구 례 1,318 154 11.7 186 14.1
고 흥 150 41 27.3 43 28.7
보 성 200 44 22.0 49 24.5
기타 지역 91 141
적대세력사건 174 235
1)5,591 863명 15.4 1,102 19.7 추정1)
2)11,131 7.8 9.9 추정2)

여순사건 희생자 추정 대비 피해 현황 설명

  • 추정 1) 5,591명은 1948년 11월 1일 현재, 전라남도 보건후생국 통계 자료와 2008년, 2009년도 위원회 연구 용역 피해자 현황조사 최종결과보고서를 참조한 최소 기준임
  • 추정 2) 11,131명은 사건발발 1년 후 전남도가 1949년 10월 25일 현재로 조사한 피해 자료임
  • 기타 지역 : 화순, 나주, 곡성, 담양, 목포, 신안, 영암, 장성, 장흥 지역 등
  • 적대세력사건 : 여순사건 당시 인민군과 지방좌익 및 빨치산에 의한 피해 사건으로 여수, 순천, 광양, 곡성, 구례, 담양 등
  • 위의 ‘추정 대비 희생자 피해 현황’은 여순사건 관련 해당지역의 국민보도연맹, 형무소재소자, 부역혐의사건 피해자는 누락된 자료임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의 여정

여순사건 특별법은 1948년 10월 일어난 여수·순천 10·19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한 취지로 발의된 법안으로 2001년 16대 국회 이후 4차례나 발의됐지만 이념 대립 등의 이유로 무산되었다가, 2020년 7월 28일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대표 발의자로 하여 152명의 의원들이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여순사건 특별법)을 공동 발의하면서 다시 특별법 제정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2020년 7월 29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 회부되고 같은 해 9월 10일에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 회부되었으며 11월~12월 사이 총 8회의 소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여순사건 특별법은 심사 안건으로 상정되지 못하고 계류했다.

이에 따라 여순사건 특별법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할 수 있도록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주관으로 여순사건 특별법에 관한 입법 공청회를 열었으며, 여순사건 관련 역사전문가들이 출석하여 제주4.3 광주5.18에 상응하는 역사적 사건이며 희생자와 유족들이 고령인 점을 감안하여 여순사건 특별법안 제정을 통한 추가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데에 행정안전위원회 위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2021년 2월 22일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 회의가 열렸으나 여순사건 특별법은 총 60건 중 32번째 심사로 12번째 안건까지 심사 후 산회하였으며, 2021년 3월 3일 총 22건 중 7번째 안건으로 상정되었으나 심사가 보류 되었다.

이후 신속한 법안 심사 및 특별법 제정 촉구 활동을 위해 여순사건 홍보단을 구성하여 국회를 방문하여 특별법 제정 촉구 결의대회를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2021년 4월 22일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국민의 힘 측이 “여순사건은 과거사법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차기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된 이후 방침에 따라 법안을 심사하겠다”는 입장 표명 후 퇴장하여 더불어민주당 법안 단독처리를 통해 여순사건 특별법안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하여 특별법 제정을 위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법안심사소위원회 통과를 시작으로 2021년 6월 16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를 통과하고 같은 해 6월 2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또한 통과하게 되면서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에 추진력을 얻으며 지난 6월 29일 제388회 국회 제6차 본회의에서 총 86건 중 10번째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마침내 국회 본회의를 최종 통과하여 희생자와 유족들의 73년의 한을 풀어주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첫 걸음인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