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수현,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순천부에 귀속

옛날에는 여수와 돌산이 서로 다른 행정구역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조선왕조 500년 동안 이 두 지역은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독립된 행정구역이 되지 못하고 순천부 관하에 귀속되어 내려왔다.

고려말엽 충정왕 2년(서기 1350년)에 여수와 돌산이 처음으로 각각 현령이 상주하는 현()으로 독립되었으며, 마지막 여수현감은 오흔인(吳欣仁)이었다. 이성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멸하고 조선왕조를 세우면서 왕의 사자(鎭撫使者)가 왔으나 오 현감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저항하였다.

나라의 기틀이 잡힌 태조 5년(1396년) 여수현도 평정되니 오 현감은 숨어버리고, 여수현은 오흔인 같은 역적을 낳은 고을이라 하여, 역향(逆鄕)에 대한 벌(승강지법昇降之法)로 여수현을 없애고 순천부에 귀속시켰다.

여수 땅을 순천부의 적량부곡, 율촌부곡, 진례부곡, 소라부곡, 삼일포향, 두평소, 조해소, 조수소로 편성하여, 이때부터 우리고장은 수백 년 동안 사용해오던 여수(麗水)라는 땅의 이름이 없어지고, 어쩔 수 없이 순천부의 부곡(部曲), 향(), 소()로 전락되어, 천민이 된 여수사람들은 모든 사회생활에 차별대우를 받았다. 도대체 한 개인이 자행한 우매한 대가치고는 너무나 가혹하고 혹독한 조선조정의 규제였다. 여수 전지역의 백성들과 그 자자손손은 500여년 동안 이런 큰 벌을 받게 되어 통한의 역사가 시작됐다. 통한의 여수향토사가 반세기 동안 계속된 것이다.

지금은 순천이 된 낙안군도 1515년 모친을 살해한 불효의 땅이 되었고, 1555년에는 노비가 주인을 살해한 배덕의 땅으로 두 차례 낙안현으로 강등됐으나 몇 년이 안가 낙안군으로 복군됐고, 정조 10년(1786년) 역모자 이태수 출생지인 순천부도 순천현으로 강등됐으나 1년만에 순천부로 복귀되었지 않는가!

여수현 오흔인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새 왕조를 거부했다고 500년간 폐현으로 남아져야 했던 통한의 역사는 조선조의 지방행정에 대한 가혹한 규제가 아닐 수 없다. 여수현을 역적의 땅이라고 폐현시킨 조선왕조가 여수땅에 변방을 지키는 전라좌수영을 설치하고 여수사람들에게 호국충절을 요구한 진남(鎭南)의 변방의 요충지로 지정한 이중적 정책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2. 전라좌수영과 순천부의 극심한 갈등

여수가 순천부의 일방적 행정지배를 받을 때는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나라가 안정되자 1479(성종10)년 3월, 여수에 전라좌수영이 들어서자 사태는 급격하게 달라졌다. 전라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으로 군사적으로는 5관5포를 통할하는 권한이 있었지만 그건 전시 때의 일이고, 평상시에는 변방의 무부(武夫)에 지나지 않았다. 순천부사의 품계는 종3품 당하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중앙에 직속하여 여수까지를 다스리는 행정의 실권이 있는 막강한 본관이었다.

전라좌수영이 들어서니 관아를 짓고, 길을 닦고, 성을 쌓고, 전선을 만드느라 세금내고 부역하고 군역을 추가로 시작했는데, 순천과 좌수영, 두 곳에 매어 시키는대로 하자니, 여수사람들은 죽으려 해도 죽을 수 조차 없는 노예보다 못한 참혹한 세상을 살았다.

운초 정종선 선생의 상소문에 나타나 있듯이 좌수사와 순천부사는 서로 무시하고 반목하고 질시하고 다투면서 백성을 다투어 괴롭히는 가렴주구가 되어, 마음껏 행패를 부리고 토색질을 함부로 하고 다녔는데, 그 피해는 애잔한 여수지역 백성들에게 돌아갔다. 심지어 양 관아에서는 어느 쪽에서 부역에 더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가를 놓고 힘겨루기를 일삼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니, 순천부와 좌수영의 대립이 얼마나 무서운 폐단이었고 극심했던가?

그 틈에서 살아야 했던 여수사람들의 참상을 다소나마 알 수 있다.

3. 여수의 복현운동과 3복3파

여수복현(復縣)운동이란 여수현을 되찾기 위한 사활을 건 활동이었다.

3복3파(三復三罷)란 순천부의 귀속에서 빠져나와 세 번 여수도호부로 복현되었다가 순천사람들의 탐욕에 의한 모략중상 때문에 세 번다 폐현되어 순천부에 귀속된 사건이다. 다시 말해 여수현을 복현시키겠다는 여수사람들의 피맺힌 여정의 역사 이야기이다.

4. 여수 복현(復縣)운동의 실상

1. 제1차 복현 운동

여수의 복현운동은 숙종시대부터 시작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치열해져 갔다.

처음에는 중앙 요로와 절충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여 봤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자 차동궤, 오석조, 차국태, 황성룡 네 분 지사(志士)들은 한양까지 올라가서 목숨을 걸고 신문고를 쳐서 여수 복현을 호소했다가 순천부의 반대상소로 억울하게 목숨만 잃고 말았다.

이러한 희생과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초지(初志)를 꺾지 않고 끈덕지게 밀고나가 마침내 1696(숙종22)년에 최극태 전라좌수사를 여수도호부사를 겸하고, 용두(순천 해룡면), 율촌, 소라, 삼일, 여수 등 5개 면을 여수도호부 관할구역으로 하는 여수현 복현이 실현된 것이다.

오랜 세월 꿈꾸던 여수사람들의 소원을 풀게 됐다. 하지만 순천부의 아전배들이 천 가지 만 가지 간교한 계책과 중상모략을 하여 1년도 못되는 사이에 여수도호부는 혁파되고 도호부사는 잡혀가 곤욕을 겪었다.

2. 제2차 복현 운동

1차 복현운동이 실패로 끝난 이후 여수사람들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발 벗고 나선 결과 1722(경종2)년12월 21일 사헌부에서 여수 복현문제가 대두되었고, 순천 유생 박시유도 상소를 올렸지만 성사되지 않고 있다가, 1725(영조1)년 좌수사 원백발을 도호부사를 겸하도록 하여, 두 번째 여수가 복현 되었으나, 순천부의 악랄한 방해공작으로 또 1년이 못가 혁파되어 순천부로 귀속되고 말았다.

3. 제3차 복현

2차 폐현 후 24년만인 1750(영조26)년에 승지 이승원을 전라좌수사 겸 여수도호부사로 임명하면서 ‘민원(民怨)이 없도록 선정에 힘쓰라’고 특별히 유서(諭書)까지 내렸으나 이번에도 1년이 안되어 혁파되고 순천부에 귀속되고 말았다.

5. 여수군의 설군과 초대군수 오횡묵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1895년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좌수영도 폐영됨). 미우라 일본공사가 부임해와 경복궁을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왕조를 마음대로 유린하면서 과거시험도 폐지하였다.

1896년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개칭하고, 지방행정구역 23부를 13도 331군으로 개편하였다. 그때 돌산군이 먼저 설군(設郡)이 되었다.

다음해인 1897년 전라관찰사 윤웅렬의 배려와 여수설군 18인 동맹의 활약과 덕양역과 성생원역의 민의 청취를 거쳐 500년 동안 철웅성 같이 묶여있던 순천부의 굴레에서 마침내 벗어나 율촌, 여수(쌍봉 포함), 소라(화양 포함), 삼일의 4개면으로 여수군이 설립되었다.

해주 오씨 오흔인의 후손인 오횡묵이 정선?고성?지도군수를 거쳐 초대 여수군수(麗水郡守)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500년이나 대대로 흘린 여수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한숨을 위로해 줄 생각 없이, 오직 가무(歌舞)와 시흥(詩興)만 탐하다가 여수군민들의 원성을 받기도 했다.

돌산군이 여수군으로 통합된 것은 일제치하인 1914년 3월이었다.
전국을 317개 군에서 218 군?면체제로 개편했다.

운초 정종선(丁鍾璿) 선생의 복 현(復縣) 상소문
  • 1811년에 출생
  • 1864년(고종1년)에 직접 올린 상소문
  • 1878년에 돌아가심
  • 1897년에 여수군이 설군되어 여수현 복현을 생시에 보지 못했음

순천에서 여수를 떼어서 다시 한 현()을 만들어 주시옵소서!

엎드려 아뢰옵니다. 원래 저희들은 초가집에 사는 백성으로서 하루살이나 개미같은 하찮은 목숨이오나, 성인(聖人)의 나라에 태어나 성인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나 옷을 입고 배부르게 밥을 먹고 사는 것은 그 어느 것이나 다 임금님이 주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거리에서 노래 부르고 격양가 드높인 것 또한 이 어찌 임금님의 베푸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태양의 밝음이 비취지 않은 곳이 없어도 음지나 비탈진 그늘에는 미치지 못하고, 아무리 봄의 햇볕이 따스하다 하더라도 마른나무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이는 요순(堯舜)같은 성군도 다 이루지 못한 딱한 일로 여겼사옵고 되도록 넓이 베풀고자 애쓰셨던 일입니다.

아, 그러나 남의 눈에 띠이지 않는 늙은 홀아비, 부모없는 아이, 자식없는 늙은이를 찾아낸다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가장 어려운 일로써 문왕(文王)도 먼저 이 일에 힘썼으며, 탕()임금을 섬기던 이윤(伊尹)도 한 사람을 구하지 못한 일을 늘 부끄럽게 여겼사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고을의 백성들이 수 백년을 두고 살아오면서도 아직 그 한()을 풀지 못하고 있는 원통한 일이 있습니다.

신(臣)등이 사는 고장은 순천부(順天府)입니다. 순천의 관할구역은 18면인데 그 중에 5면이 여수현 이었습니다.

용두(현 순천시 해룡면), 율촌, 소라, 삼일, 여수 등 5면이 그곳입니다.

그런데 이 5면은 원래 여수현(麗水縣)이었습니다. 지나온 내력은 신라와 고려 때까지 구역을 갈라서 다스려 온지가 오래되었으나, 우리 조선시대에 이르러 여수현관(麗水縣官)을 파하고 부역, 납세, 병역을 순천에 붙여버려 순천은 이미 도호부가 되었고, 중기(中期)에 와서 좌수영을 여수에 설치하니 여수 5면은 좌수영과 순천부 사이에 끼여, 옛날 등나라가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끼인 것과 같은 꼴이 되어, 순천부에서는 좌수영 밑에 있다하여 돌보지 아니하고, 좌수영에서는 순천부에 속한 땅이라 하여 보살피지 아니하고 서로 미루고만 있어, 여수는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순천부의 백성이요 좌수영의 군졸들인지라 두 곳의 백성노릇을 하다 보니 전혀 틈이 없어 살려고 애써도 살수가 없고, 죽으려고 애써도 죽을 틈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슬프고 또 원통합니다.

대체로 좌수영에는 전선 4척, 병선이 5척, 각선이 11척이 있고, 방답진(돌산)에는 전선이 1척, 병선이 2척, 각선이 4척이며, 고돌산진(현:화양면 용주리)에는 전선이 1척, 병선이 2척, 각선이 2척, 본부전선 1척, 병선이 1척, 각선이 2척으로서 모두 36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따른 사포수(射砲手), 능노군(能櫓軍), 대포장(大砲匠), 사공(沙工)들과 수영상이위장교(水營上貳瑋將校), 군로사령, 경사기장(京沙器匠), 목수(木手), 취타수(吹打手)들도 모두다 여수백성이 맡고 있으며, 그밖에도 돌산, 진례(進禮), 백야곶(白也串) 세 곳에 있는 봉화대도 여수 땅에 있으므로 여수백성들로 채우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고돌산진에 있는 554명의 소모군(召募軍)까지 모두 여수사람들로 뽑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순영목군(巡營牧軍), 곡화목군(曲華牧軍)까지 합하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에 따른 비용이나 양식들을 모두 여수 백성이 물고 있습니다. 그 외에 정병(正兵)에 이르러서는 수군금위호군(水軍禁衛護軍), 호보경포(戶保京砲), 경사기장(京沙器匠), 공조장인(工曹匠人), 사후제원(伺候諸員), 병영신선(兵營新選)과 동오군(東伍軍), 승오군(陞五軍) 등으로 진()들이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순천백성과 여수백성이 함께 맡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역(賦役)에 있어서는 우리 여수백성들은 좌수영의 부역에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순천의 부역까지 나가니 한 몸으로 두 곳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령 한집에 4 ~ 5명의 가족이 있다하면 아버지는 수영의 부역에 나가고 아들은 순천의 부역에 나가며, 형은 수영의 부역에 나가고 동생은 순천의 부역에 나가야 하는데, 그것도 어떤 때에는 하루사이에도 아침에는 수영의 부역에 나가고 저녁때는 순천의 부역에 나가야 할 때가 있으니, 한 몸에 두 지게를 져야하는 것이 이 고장 백성들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거리입니다.

차라리 순천의 부역에만 나가게 하던지 좌수영 부역에만 나가게 하던지 한쪽을 감해 주셔야지 이렇게 양쪽 부역을 모두 감당한다 해서야 어찌 백성이 견디어 내겠습니까!

어디 여수백성들의 고통이 그것뿐이겠습니까! 나락을 거두어 드리는 일 한 가지만 하더라도 좌수영과 순천에서 겹쳐서 받아 갑니다. 이 고장에는 내?외면에 걸쳐서 18개의 창고가 있는데 이중 14개 창고는 순천에 속하고 단지 4개 창고만 좌수영에 속해 있는데, 이중 좌수영 창고에는 8,000여석과 방답진(돌산), 고돌산진, 곡화목군, 순천부의 군선 순영모군(巡營募軍) 몫을 합한 10,000석을 500백성들이 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가는 방법이 되나 홉으로 되지도 않고 우격다짐으로 받아 가는데 이것도 다른 고장에서는 볼 수 없는 여수 5면만의 큰 폐단입니다.

또한 여수 5면은 산을 등지고 바다에 인접하지 않은 데가 없어 물길이 메말라서 논을 만들 수 없는 땅이라, 논뙈기 밭뙈기가 대부분인데 풍년이 들어도 흉년이기 쉽고, 비가 많이 와도 가물 때가 많을 뿐아니라, 어떤 때에는 풍해를 입거나 해일을 만나 백성이 굶어죽게 되어도, 아직까지 나라에서 가난한 집이나 이재민들이 도움 받은 일이 한번도 없었으니 이 일 역시 지극히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여수에서 본부로 가려면 60리, 70리, 혹은 150리가 되는데 아전들의 농간이 집집마다 미쳐 그 폐단이 이를데가 없습니다. 외진 섬에 사는 백성이나 벽지에 사는 백성들은 순천부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본관(순천부사)이 누구인지도 모르며, 다만 아는 것은 ‘나는 본부에서 나왔다. 나는 좌수영에서 나왔다.’하고 외치면서 아무데나 제멋대로 휩쓸고 다니는 아전들을 알 따름인데, 이들은 악착스럽고 사나운 무리들로 방울을 흔들면서 떼를 지어 마을을 도는데 이때 한 섬이나 두 섬의 나락을 억지로 빼앗아 가는 것은 고사하고, 오량전이나 십량전 쯤의 돈을 한마디로 거뜬히 뜯어가는 것은 예사로운 일입니다.

이때 이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가지고 다니는 종이와 먹으로 동리 어귀에다 ‘누구누구는 관명을 어겼으니 곧 관군이 잡으러 올 것이다’고 써 붙이고 공갈하여 수많은 돈을 빼앗아가니 슬프다. 애잔한 백성들은 하늘과 땅 사이에 호소할 데가 없어 필경에는 다른 고장으로 야반도주하는 백성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또 여수 5개면에는 본부 면주인과 좌수영 면주인이 따로 있습니다. 이들은 각기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을에는 나락을 받아가고, 여름에는 보리를 걷어 가는데, 이것을 본부와 수영의 면주인들이 서로 시새가면서 함부로 토색질하고 있으니 어찌 백성들이 지탱하겠습니까!

이밖에도 본부면임과 좌수영면임에게 별도로 비용까지 물어 줘야하니 면민들이 어찌 견뎌내겠습니까! 더욱이 요즈음에는 그 횡포가 날로 더 심해져서 족징(族徵), 척징(戚徵), 면징(面徵)이라는 것이 있는데, 족징은 같은 집안의 2~3촌까지, 척징은 고종간이나 이종간까지 삼성(三性)에 미치고, 면징은 면임 중에서 간사한 자가 면임과 짜고 받아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본부(순천)가 먼 곳에 있는 고로 본관이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수 경내에는 섬이 많음으로 바다를 건너서 본부까지 가려면 꼬박 3일이 걸리고, 진상품이라는 것은 값이 배가 비싼 법인데, 이것도 좌수영과 본부에서 따로 받아가고 있어, 다른 고장에 비하면 여수 백성들의 부담은 배가 더 되어서 어찌 우리 백성들이 견뎌내겠습니까! 이와 같은 폐단은 우리나라에 3백개의 읍이 있으나, 다른 고장에는 없는 일이요, 오직 우리 여수 5면에만 있는 일이니, 우리 여수 백성들은 이 나라에 없는 백성노릇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좌수영은 국가의 가장 큰 나라의 방어진지인데, 처음 생겼을 때는 제도가 엄정하고 규모가 컸으며, 곡식이 많이 쌓여 수년을 지탱할 만하고 군비 역시 넉넉했으며, 영내에 사는 백성만도 1,000호에 가까웠고 영외에 사는 백성 또한 1,000호에 가까웠으나, 모두 살기가 넉넉하고 군비도 충실하여 마치 우리나라의 큰 곡창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 이내 기울어져 가기 시작하여 초상을 치르고 난리를 겪은 집과 같이 백성들이 이미 반 이상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곡식을 쌓아둔 창고는 이내 반으로 줄었는가 하면, 군대는 죽은 사람까지 산 사람으로 계산하고 있고, 군량은 없어졌는데도 빈가마니로 문서에만 채워져 있으며, 배와 배에 딸린 모든 것들은 낡아빠져 쓸모가 없고, 무기는 녹슬어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태평성대를 만났으니 망정이지, 만약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같은 큰 국난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군대의 기율이 이와 같고 창고는 비어 있으니 장자방(張子房)으로 하여금 전략을 짜게 하고 한신(韓信)이가 살아서 용병을 하게 한들, 어찌 능히 그 지혜와 용맹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뜻있는 자 마땅히 땅을 치고 통곡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양의(良醫)는 죽기 전에 그 병을 알아야 하고, 양공(良工)은 집이 무너지기 전에 기운 것을 알아야 할 것이어늘, 하늘의 명이 다한 다음에야 편작(扁鵲)같은 빼어난 의사도 손을 쓸 수 없을 것이오, 제 아무리 양공인들 어찌 그 재주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여수 5면의 사정인즉, 이내 죽을 병을 얻은 환자와 같으나, 아직 가냘픈 한 가닥의 혈맥이 남아있고, 이내 기울어진 집과 같으나, 한 가닥 석가래가 지탱하고 있으니, 이때야말로 양의로 하여금 그 병을 보게 하고, 양공으로 하여금 집을 손질하게 하면, 앞으로 임금님의 나라를 보존하게 할 수 있을 것이요, 기울어져 가는 집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님께서는 총명하시고 인자하시여 백성들이 올바르게 살게 하시고, 타고난 어진 마음씨와 자애의 정을 바탕으로 덕을 베푸셔서 가난하고 약한 백성을 도와 오셨고, 해와 달처럼 밝으심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쳐 주셨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어지신 가르침을 내리셔서 애잔한 백성을 돌보고 계십니다.

진실로 되돌아 보건대, 조선팔도가 고루 평안한 것을 얻게 하고, 백가지 폐단이 다 없어져서, 서민들이 새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끔 여러 고을의 정치를 혁신하여 주시는 가운데, 오직 여수 5면만은 엎어진 그릇에 햇빛이 미치지 못하듯이, 누구나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하시는 혜택에서 소외되고 있으니, 진실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좋은 방안 하나를 논() 할진대, 어리석은 백성의 말이라 할지라도, 임금님께서 밝으신 은총으로 받아주시기를 엎드려 바라나이다.

첫째 여수를 복현하는 일은 이미 수 백년 전부터 울면서 호소해도 이루지 못하던 딱한 일이었습니다.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여러 차레 여수백성들이 상소한 결과, 임금님께서 허락하여 주신바 되어 곧 경계를 갈라서 한 현을 만들고, 좌수사로 하여금 여수부사를 겸하게 하여, 5면을 좌수영에 속하게 하고, 13면은 순천부에 속하게 하였는데, 순천 아전배들이 천가지 만가지의 간사한 계책을 꾸며 전라감영을 속이고, 심지어는 조정까지를 속여 1년도 못되는 사이에 혁파시켜 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1725년부터 1735년에 다행히 지평 이근지(李根之)가 다시금 여수복현을 상소하여 또 한 번 복현되었는데, 이때도 순천 아전배들이 또 간사한 꾀를 부려서 이를 훼방 놓아, 또 1년도 못되는 사이에 혁파되어 버렸습니다.

또 세 번째는 여수백성들이 상소한 결과(1736 ~ 1795년) 임금님께서는 밝게 사리를 판단하시고, 승지 이성원에게 특명을 내리시어, 수군절도사 겸 여수도호부사를 겸하게 하여 다시 경계를 가르고 복현을 시켰는데, 이때도 순천부사와 못된 아전배들이 간사한 농간을 부려 1년도 못되어 도로 혁파케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여수백성들은 다시 살아갈 희망이 없어지고 오늘과 같이 피폐하게 되었으니 어찌 살아날 재주가 있겠습니까! 실로 복현이 되면 우리 여수백성에게는 크나큰 하늘의 복이요, 순천부로 봐서는 조금 덜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수가 현이 되면 순천부사의 봉급이 1/5 감해질 뿐입니다.

이것이 순천 아전배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옛날처럼 여수현으로 다시 만드는 것을 반대해 온 소위 삼복삼파(三復三罷)라는 것입니다.

순천은 13면이나 되는 대읍이요, 여수는 5면 밖에 안되는 작은 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것을 아끼려다 큰 것을 놓치게 되면 어찌 나라의 장래를 도모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장차 백성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잃고 거리를 헤매다가 고을이 비고, 땅이 황폐하게 되면 어찌 슬프고 또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우리나라의 옛일을 되돌아보더라도 고을을 폐했다가 다시 세운 전례가 있으니, 영남의 자인(慈仁), 호서의 신창(新昌)이 그것이오, 또 수사(水使)가 있는 곳을 있는 곳을 본관으로 바꾼데가 있으니 강화의 교동과 해서의 옹진이 그것입니다.

여수의 복현 역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수사로 하여금 본관을 겸하게 하는 것이 법에 어긋나거나 어려운 일도 아니요, 나라에 손해가 없고 오히려 이롭게 하는 일이요, 궁한 백성을 살찌게 하는 일입니다.

이제 여수 백성들이 오래 품어온 한을 들으셔서 한 현을 만든다는 것이 중대한 일이기는 하나 이미 좌수영이 세워져 있고, 관아와 창고가 있어 이런 것을 세울 비용이 들지 않으며, 아전이나 노비 같은 것도 이미 다 갖춰져 있으니 별도로 민폐를 끼치는 일 없이, 좌수영에 여수현을 세우면 손바닥을 뒤엎는 것 같이 쉬운 일입니다.

특별히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골라 수사와 부사를 겸하게 해서 5면을 다스리게 하는 한편, 학문을 일으키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서 무위(武威)를 펼치게 하여 영구한 장래를 도모하면 나라의 행복이 될 것이오, 여수백성들의 큰 복이 될 것입니다.

신()이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여 감히 천리 길을 멀다않고 만 번 죽을 각오를 하고 간이 떨리고 피가 끓는 마음으로 지금 어전에 엎드려 있사오니, 원컨대 천지부모이시여! 조정에 특명을 내리시어 여수현을 복원하여 좌수영에 전속케 하시고, 수군절도사로 하여금 본관을 겸임케 하시고, 잘 다스려서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을 정종선(丁鍾璿)이 부르짖고 울면서 간절히 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