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라남도 여수에서 1945년 해방 후 조직된 치안과 행정 활동을 위한 임시 행정기구.
개설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 체제로 바뀌자 대부분의 지방에서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개조되거나 인민위원회에 흡수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초기에 미군정에 협조하고자 하였으나 미군정은 이를 배척하였다. 결국, 미군정과 인민위원회 간에는 갈등 대립 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상당수 많은 시군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조되었던 데에 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는 독자적인 형태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여수의 인민위원회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와는 별도로 새로 결성된 경우이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의 조직 구성은 위원장 정재완, 부위원장 이우헌, 치안부장 김수평, 총무부장 김성택, 재정부장 김정평, 문화부장 김문평, 관리부장 김경택, 민생부장 연창희, 노동부장 이창수 등이 근무하였으며, 기타 활동인으로는 안종호, 김우성, 김관평, 조종응, 정태식, 여도현, 오두영, 이용기, 이창주, 김종균, 곽채용, 강재주, 강선희, 김한희, 문재호, 남재일, 정경수, 김득평, 김정식, 장기, 이기조, 박홍근 등이 있었다.
추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의 주요 간부는 미군정에 의하여 여수시의 행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앉게 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의 위원장 정재완이 군수가 되고 부위원장 이우헌은 여수읍장이 되었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치안대를 책임지던 치안본부장 김수평은 여수 경찰서장이 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의 주요 임원이 미군정청 하의 관리가 된 것이다.
변천
1945년 8월 17일 전라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발족함에 따라 1945년 8월 20일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진남관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가 결성되었다. 1945년 10월 10일 미군이 광주에 들어오고, 1945년 10월 20일에는 미군이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신월동에 진주하고 나서, 군·읍·면의 행정이 미군정체제로 되는 바람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의 존재 자체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활동사항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치안 유지였다. 해방이 되자 일제의 통치 기능이 갑자기 무너지는 바람에 거리는 한때 상당한 혼란이 왔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치안대에서는 이에 대비해 완장을 차고 질서유지에 나서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무사귀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또한, 일본을 비롯한 만주나 국외에서 많은 귀국 동포들이 쏟아져 들어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에서는 전관평과 백해천 등이 구항부두에 귀국동포임시접수소를 마련하고 이들을 맞아들여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의 연탄 공장부지 일대와 전라남도 여수시 종화동의 자산공원 밑에 있던 일본군 병사(兵舍)와 해월루 등에 수용했다.
현재의 전라남도 여수시 신월동에 있었던 일본군 부대에서 식량과 모포 등을 가져와 이들을 구호하였다. 지금도 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의 연탄 공장부지였던 자리는 귀환정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전라남도 여수시 봉강동 지역에는 당시 일본인 녹모(鹿毛)가 경영하던 삼공주조장이 있었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에서는 삼공주조장을 계속 가동시켜 정종 술을 만들어 주민들에게 공급하였다.
참고문헌
- 『여수·여천향토지』 (여수·여천향토지편찬위원회, 1982)
- 김계유, 『여수·여천발전사』 (반도문화사, 1988)
- 이종범 외, 『여수시의 문화유적』 (여수시·조선대학교박물관,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