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945년 해방부터 현재까지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 2012 세계박람회 개최 부지
- 2012 세계박람회 유치기원 철야 응원제
- 2012 세계박람회 조감도
변천
1949년 6월 여수항의 개항이 선포되고, 같은 해 8월 여수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지역은 여천군이 되어 여수시와 분리되었다. 1973년 여천군 돌산면 경호리가 여수시에 편입되어 경호동이 신설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 돌산면과 삼일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1월 1일 여천지구 출장소가 여천시로 승격되었고, 경호동 일부가 여천시에 편입되었다. 1998년 4월 1일에는 여천시·여천군·여수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여수시가 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20일 여수군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가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치안을 유지하고 해외로부터 귀환하는 동포를 원조하였으며, 일본군의 군수 창고를 경비하고 일본인 소유의 주조장을 자주 관리하는 등의 사업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부분 지방에서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개조되거나 인민위원회에 흡수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초기에 미군정청에 협조적이었으나 미군정이 배척하자 결국 미군정과 인민위원회간에는 대립 전선이 형성되었다.
여수의 건국준비위원회는 다른 곳과는 달리 인민위원회로 재편되지 않았고 여수의 인민위원회는 별도로 새로 결성되었다. 여수군 건국준비위원회 주요 간부는 미군정에 의하여 여수시의 행정을 책임지는 위치에 앉게 되었다. 위원장인 정재완이 군수가 되고 부위원장 이우헌은 여수읍장이 되었으며, 치안대를 책임지던 치안부장 김수평은 여수경찰서장이 되었다. 여수군 건국준비위원회의 주요 임원이 미군정 하의 관리가 된 것이다.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지창수를 비롯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병사들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제주도 4·3항쟁 진압을 위한 파병 명령을 거부하면서 주둔지인 여수에서 봉기하였다. 이 봉기는 남조선노동당과 사전에 연락을 갖고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 아니라 제14연대 내의 세포원들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남조선노동당 중앙은 물론이고 전라남도 도당이나 여수·순천 지역의 지역당까지도 사전에 봉기 사실을 알지 못했다. 봉기를 계획한 하사관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봉기를 일으킨 다음에 어떻게 진행할지도 뚜렷이 정해진 바가 없었다.
그러나 제14연대 봉기는 매우 빠르게 파급되었다. 19일 늦은 밤에 시작되었지만 봉기군들은 다음날 동트기 전에 여수를 점령했고 아침에는 순천으로 진입하였다. 인근 지역에서 지원 나온 경찰관들이 봉기군의 순천 진입을 막으려 애썼지만 봉기군은 경찰보다 더 많이 불어났다. 순천에 주둔하고 있던 홍순석이 지휘하는 제14연대 파견대가 봉기에 합류했을 뿐만 아니라, 멀리 광주에서 진압하러 나온 제4연대 소속 병사들도 봉기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며칠 만에 여순사건은 광양·구례·보성(벌교) 등 전라남도 동부 지역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봉기군이 점령한 여수와 순천에서는 지방 좌익 세력과 청년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여 광범한 대중 봉기로 발전하였다. 남조선노동당 당원들은 인민위원회를 건설하여 식량 배급과 함께 친일파·민족 반역자·반동 세력 등을 처단함으로써 기초적인 행정을 시작했고, 학생들은 총을 잡고 봉기군을 원조했으며 여학생들과 여성 조직원들은 봉기군에게 밥을 해주는 등의 일을 도왔다.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뒤 처음 맞는 정치적 위기였다. 하지만 전국으로 파급되지는 못하였고 전라남도 동부 지역 점령에만 머물렀다.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을 며칠간 점령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은 봉기군과 진압군이 점령을 반복하든지 아니면 한 차례의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끝났다.
정부는 38선 경계 병력을 제외한 남한의 모든 군대로 진압군을 편성했다. 미군은 임시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군수, 인사를 통제하면서 진압 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진압 작전을 주도했던 것은 미군사고문단과 만주군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광복군 출신의 송호성은 진압 작전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지만 실제로 진압 작전은 만주에서 빨치산 토벌 경력이 있었던 김백일·백선엽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공식적인 지휘 체계도 흔들려 진압 작전을 주도했던 인물들의 편의에 따라 변경되기도 하였다.
순천과 여수를 점령한 진압군과 경찰은 우익 청년단원들과 지방 우익 세력의 도움을 받아 봉기군 협력자 색출에 나섰다. 혐의자들에게는 아무런 변호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채 우익 세력의 ‘손가락 총’에 지목되어 즉석에서 참수·사형되거나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그 결과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해방 전후의 한국 현대사는 서로 체제가 다른 분단 정권의 수립으로 귀결된 까닭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 또한 연구자에 따라 매우 다르다. 여순사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당시의 이승만 정부와 언론 기관 그리고 국방부에서 간행한 공식 간행물 등은 여순사건을 여수 14연대 ‘남조선노동당 세포들이 대한민국을 전복하기 위해 일으킨 군 내의 쿠데타’라든지, 남조선노동당 중앙이나 지방 좌익들이 일으킨 반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평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으며, 다른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여순사건에서는 좌익에 의한 경찰·우익인사 학살뿐만 아니라 진압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광범위하게 일어났는데, 이러한 유혈적 결과의 책임은 봉기 세력과 지방 좌익 세력들의 책임으로만 떠넘겨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좌익의 폭력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평가는 편향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과 여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38선 전역에서 시작된 한국전쟁은 과거 해방 공간에서 신국가 건설론을 가지고 대립하였던 민족 내부의 대립과 갈등이 폭발하여 맞게된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서로 다른 체제를 지향하였던 세력들간의 대립은 전쟁이라는 극단의 상황에서 살육과 파괴의 형태로 나타났고, 그 참담한 결과는 우리 민족에게 커다란 고통을 남겼다.
여수 지방도 이 같은 한국전쟁의 아픔으로부터 비켜날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곧바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대한민국을 절대 지지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박멸하기 위해서 과거 좌익 단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을 모두 가입시켜 일정한 심사와 교육을 받게 만든 사상 단체였다. 특히 여수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의 경우는 대개가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 검속의 형태로 경찰은 거문도의 신사 터, 여수경찰서 무덕관, 경상남도 남해도 남단의 애기섬, 가막섬 부근, 장도의 ‘흰여’ 등지에서 여수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집단 학살하였다. 이렇듯 여수사건의 영향에 따른 학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재연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북한 인민군의 남하와 인민위원회의 복구에 따른 우익 인사들의 학살로 이어졌다.
1950년 7월 23일에 광주를 점령한 북한 인민군 제6사단은 그곳에서 각각 나누어져 제13연대는 목포로, 제14연대는 보성으로, 제15연대는 순천으로 진출하였다. 이 부대들은 7월 25일 다시 순천에서 합류하여 하동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그렇기에 여수 지역에는 실제 북한 인민군이 진주하지는 않았으나 북한의 점령 정책이 인민위원회의 복구로 결정되자, 과거 남조선노동당 등에서 좌익 활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이 이에 호응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엔군의 반격 작전으로 북한 인민군의 퇴각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북한 정권은 우익 인사들의 처형을 명령하였고, 이 명령에 따라 각지에서 우익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이 와중에 여수에서는 애양원교회의 목사로 나환자를 돌보고 있었던 손양원 목사가 처형당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1902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출생하여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여수 애양원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5년간의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 9월부터 애양원 원장을 역임한 손양원 목사는 여순사건 때 좌익의 학살로 두 아들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주위의 피난 권유를 뿌리치고 애양원에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 9월 13일에 여수내무서원과 율촌분주소원들에게 잡혀가서 9월 28일 여수시 미평과수원에서 48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3·1운동에 참가했던 윤형숙 의사도 전도사라는 이유로 여수내무서원에 잡혀서 손양원 목사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52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통합' 여수시의 출범
1949년 여수읍이 여수시로 승격하면서 여수군이 여수시와 여천군으로 분리되었다. 1966년부터 여천군 삼일면과 쌍봉면에 여천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여천공업단지는 1970년대 들어 우리나라 유수의 석유화학공업단지로 발전하였다. 이 지역의 인구가 크게 늘고 또한 주거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이에 따라 1976년 이 지역이 여천군에서 분리되어 여천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80년 12월 1일에는 돌산대교가 착공되어 1984년에 준공되었다. 1986년에 여천출장소는 여천시로 승격되었다. 원래의 여수군이 여수시·여천시·여천군이라고 하는 2시 1군의 행정 체계가 된 것이다. 1996년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에 따른 행정 특례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정부에서 여수시의 통합을 유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여수 시민들의 자발적인 발의로 다시 통합이 논의되었고, 1998년 4월 1일을 기하여 오늘의 통합 여수시로 다시 출범한 것이다.
한편 1989년 여수수산전문대학이 여수수산대학으로, 1993년 여수수산대학교로, 다시 1998년에는 여수대학교로 승격하였다가, 2006년 전남대학교와 통합되어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가 되었다.
통합 여수시 출범은 우리나라 지방자치제의 발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중앙 정부의 정책 시행에 의한 것이 아닌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하여 통합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수인은 그간의 역사 경험에서 오는 자각과 미래를 향한 실천적 합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러한 선택을 하였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여수 지방은 새로운 천년을 향한 역사 문화 경제 역량을 결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2012여수세계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유치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여수·여천향토지』 (여수·여천향토지편찬위원회, 1982)
- 김계유, 『여수·여천발전사』 (반도문화사, 1988)
- 이종범 외, 『여수시의 문화유적』 (여수시·조선대학교박물관, 2000)
-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