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MBC 창사 31주년 특집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 > #3 부용산가 (특집다큐 2001년)

날짜
2021.10.13 13:26
조회수
285
등록자
윤성현
여수 MBC창사 3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아직도 못 다부른 노래
(호주 시드니) 한국인 박기동 선생의 집 반백년 세월 역사의 어둠에 묻혀야 했던 한 노래의 부활은 이억만리 팔순 노인의 맺힌 응어리를 풀었다
자신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얼마전 음반으로 나온데다 고향에서는 시위 개막식을 위해 선생을 초청한것이다.
고국을 떠나온지 18년째 이제는 제법 이곳생활에 익숙해질 법도 하련만 시간이 흐를수록 외로움의 그림자는 짙게 드리워진다.
박기동(85)83년 호주이민 - (50여년만에 부활된 부용산가에대한 소감은?)
인생무상.. 덧없는것 내가 외록게 이렇게 서있는거 꼭 내가 처지를 내가 표현한것같아.. 그래서 여기 엎드려서 한참 울었어요 혼자
귀향을 하루앞둔날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손에 잡힐 듯 다가오는 부용산자락 마음은 벌써 고향땅 언저리를 헤맨다
부용산가 작사 박기동 / 작곡 안성현 / 노래 안치환
부용산 산허리에 잔듸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8년만의 귀향을 축복이라도 하듯 촉촉한 가을비가 내리던 날 공항으로 들어서는 박기동 선생의 발걸음엔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2000년 9월 8년만의 귀국)
평생을 천현처럼 따라다니던 좌경이라는 이름의 감옥 생애마지막 단 하루 한순간 만이라도 자유롭게 살고싶어서 떠나온 조국 모진세월의 덮게에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앙금처럼 되살아 난다
(1917년 여수군 돌산읍에서 출생)(벌교 남초등학교 졸업후 일본으로 건너가 중,대학을 다님)
1917년 여수돌산에서 태어난 박기동 선생이 부용산자락의 벌교땅으로 옮긴것은 보통학교 4학년 무렵이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대학을 졸업한 해방 두돌을 남겨두고 다시 고향벌교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그의 꿈많은 교사생활이 시작되었고 춘천 사범학교 재직도중 누이의 죽음이라는 비운을 맞는다
박기동(85세) 호주시드니, 부용산가 작사 사진은 덜 미인이네.. 실물은 조금 나은데.. 미인인데 얼굴보다는 마음이 더 고운..
18에 시집간 누이가 뒤를 이을 자식도 없이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부용산 자락에 그녀를 묻었다 그리고 빛바랜 사진으로 남은 누이를 그리며 그 애끓는 추모의 정을 한편의 시로 읊은것이 부용산이다. (1948년 목포항도여중으로 전근)이듬해 목포 항도여중으로 자리를 옮긴 박기동선생은 이곳에서 음악교사인 안성현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작곡가로도 널리 알려진 안성현 선생역시 1년전 여동생을 폐병으로 잃어야 했던 동변상련의 아픔이 있었다 그러던 48년 문학대 꿈을 키우던 제자 김정희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아끼던 안성현은 죽은 누이를 그린 박기동의 시를 악보에 옮기기 시작한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부용산가였다 (부용산가 최초의 악보)

박기동 - 안선생은 내 누이동생이 죽었다 어쨌다 생각없이 아마 김정희가 죽은걸 내가 애도한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고 곡을 만든것같아요
사랑하는 누이를 다시볼 수 없는 세상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혈육의 정 그리고 열다섯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시들어버린 애제자에 대한 설움은 고향에대한 향수를 담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실어 강물처럼 세인들의 가슴을 타고 흘렀다. 좌우익을 떠나 부르는 사람 누구라도 한목소리로 부르던 노래였던 것이다.

이대순(70)벌교출신, 한국대학총장협회장 - 순천을 중심으로 벌교에 이제 학생들 간에는 거의 다 많이 불렀구요 목포, 광주 일대에서는 상당히 많이 불려졌습니다. 지금도 벌교분들이 모이면 이노래 부르죠 지금도 목포분들이 모이면 이노래를 못부르면 목포사람이 아니다 그런 노래예요 노래자체는 아주 우리 국민정서에 알맞은 노래죠 노랫말 어디에도 불어난 사상이나 이념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부용산가는 어느새 빨갱이 노래로 치부된채 금기시 되고 있었다

조정래 벌교출신, 소설가 - 제가 국민학교 다닐때 나이든 처녀들이나 아니면 젊은 총각들이 잔디만 푸르러푸프러 노래를 불렀는데 그게 그때 부용산이라는 노래의 한구절이였고 그노래가 좋아서 더 불러보라고 하면은 중단하고 왜그런가 했더니 이것이 인민군들이 부르는 노래다 또는 빨치산들이 부르는 노래다 이렇게 되어서 금지곡이 되었기때문에 부를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지금도 그 노래 가락들이 귓속에 잔잔하게 남아있어요

이두균(76)비전향장기수, 작년에 북으로 감 - 비전향장기수였던 이두균씨. 빨치산으로 활동하던 선생또한 당시 부용산가를 부르며 떠나온 고향을 그리던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빨치산 활동당시 부용산가를 부름)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가고 말았구나

그러나 민중의 한과 서러움을 대변하던 부용산가는 (안성현 결혼사진) 한국전쟁당시 작곡가가 월북한 사실이 문제가 되어 더이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못한채 역사의 저편에 묻혀야 했다 작곡가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박기동 선생또한 그토록 바라던 시인의 꿈을 접어야 했다 평생을 사상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박기동 - 많이 당황했죠 이것저것 종합적으로 좀 이상한 시를 쓴다 행동도 좀 이상하다 저녀셕이 빨갱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좀 색채가 있다 그런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가지고 당국에 불려가기도 하고 어떤때는 가서 발길도 채이기도 하고 이런얘기 해서는 안되지만 육군 영창에도 들어가고..

지난해 10월 부영산 오릿길 부영각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52년만에 죽은 누이를 묻으며 지었던 슬픔의 시가 바로 고향땅 그곳에서 다시 부활한것이다.
피어나지 못한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잃어버린 노래 단한번도 목놓아 불러보지 못했던 노래 부용산가가 긴 세월의 강을 넘어 당당히 세상의 빛을 보게 된것이다.
이날 식장에는 뜻깊은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곡가 안성현선생의 미망인 성동월 여사가 찾아온 것이다
여사 - 신랑만난 것같네요
박기동 - 저는 안성현 선생 만난것같아요
여사 - 본인이 이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너무 좋아했을텐데 대신 서 가지고 미안하네요. 좋은시가 있었기 때문에 곡이 나왔죠
박기동 - 곡이 나왔기 때문에 시가 살았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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