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MBC 창사 31주년 특집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 > #4 맹서하는 깃발

날짜
2021.10.13 13:27
조회수
237
등록자
윤성현
여수 MBC창사 31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
대구시 백안동 팔공산 기슭
제삿날을 모르는 늙은 아들이 변변한 영정하나 없는 사진속 젊디 젊은 부모에게 큰절을 올린다.
이광달(61)조각가 - 다 같은 시대에 살면서 왜 이렇게...
울어도 울어도 마르지 않는 눈물 그 뒤안에는 굴절된 현대사가 낳은 또다른 희생자의 50년 세월이 있었다.
(부모님 사진)
아버지 이원식, 1913년 칼날같은 일제 식민치하에 태어난 이원식은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모인다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조국의 독립과 지역의 문화운동을 이끌며 혁명가이자 민족운동가로 활동했다
(아버지 이원식 1917-1977 서지학자, 의사, 한의사, 수학자 등으로 활동하며 일제때 독립운동을 했으며 50년대 이후로는 문화운동을 함)
손이 곱던 아내와 두딸아이 그리고 외아들 광달을 누구도다 아끼던 아버지 해방 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간에 냉전의 희생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미군정의 무책임한 정책으로 인해 남한 노동자들은 실업률과 기아선상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9월 총파업에 이어 이원식이 주도한 10월 대구항쟁으로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46.10.1대구인민항쟁 주도) 극도의 혼란과 위기속에 1948년 12월 이승만정권은 국가보안법을 단행했다
그리고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교화시켜 보호하고 통제하기 위한 명목으로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연구위원 - 보도연맹은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목적으로부터 출발 했지만 실제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무고한 국민들이 대다수 였습니다. 왜냐하면 보도연맹의 조직원 수를 늘리기 위해서 가입을 강요했기 때문이죠 보도연맹이 문제가 되는것은 한국전쟁 전후에 일어났던 대규모적인 학살때문입니다.
민족최대의 비극 한국전쟁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정권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무차별적인 즉결처분을 단행한다. 그들이 인민군에 동조하거나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였다 (보도연맹사건 당시 희생된 사람들)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이원식에게도 보도연맹가입이 강요되었다
(어머니 정정희 당시 29세 - 검속대상인 아버지 대신 끌려가 처형당함)
그러나 경찰은 몸을 숨긴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를 끌고가 처형했다 어미찾아 울부짖는 핏덩이 어린 세자식을 뒤로한채 기약도 없이 끌려가던 그 어머니는 어느하늘아래 잠들어 있을까 당시 어머니가 끌려가 죽은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가창골 계곡은 죽음의 골짜기로 불려왔던 것이다
41년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던 이광달씨는 이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내고 직접 유골을 수습하기도 했다
계곡부근에 사람들이 죽은 그장소는 풀이 아주 왕성합디다. 그래서 그걸 흙에 파보니까 해골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1960년 이승만정권의 붕괴와 함께 이원식은 피학살자 유족회를 구성했다 (당시유골발굴현장)(이광달, 이원식 사진)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억울하게 죽어간 아내를 위해 6.25직후 벌어진 보도연맹학살사건 진상규명에 나섭니다.
한국군 특무대와 경찰의 철저한 계획하에 잔혹하고 조직적으로 자행된 학살이 하나, 둘 그참상을 드러냈다.
유부녀, 노인, 갓난아이 할것없이 무차별적인 인간사냥이 자행된 것이다. 집단학살과 수장, 암매장의 현장이 생존자와 증언자들에 의해 전국에서 속속 발견되었다
(보도연맹 관련 피학살자에 대한 기사) 신문을 비롯한 언론마다 매일 처럼 기사화 하고 때를 같이해 국회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전국의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에 관한 긴급결의안이 상정되고 진상조사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학살이 자행된지 실로 10년만의 일이였다
(전국각지에서 약 20여만명이 학살당함)

이원식은 무덤도 없이 죽어간 혼령들을 달래고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맹서하는 깃발'직접작사한 후 권태호에게 부탁해 곡을 만들었다
이광달 발굴당시 고3 - 자기아들 자기부모들이 여기에서 세상을 버린게 아닌가.. 막 해골 안고 가사 프린트된걸 보고 읽으면서 울면서 아주그 한맺히고 피맺힌 눈물이 그냥 눈물이 아니고 온몸에서 흐르는 그런 눈물을 처음 봤습니다.
맹서하는깃발 작사 이원식, 작곡 권태호, 노래 이호섭 외 - 무덤도 흔적도 없는 원혼들이여 천년을 두고 두고 울어주리라 조국의 산천도 고발하고 푸른별도 증언한다 가자 서로가 아는것이 큰힘 유족들은 한섞인 노래를 토해내며 유골을 발굴해나갔다 이것은 노래라기보다 하나의 몸부림이였고 처절한 절규였다
(피학살자 유족회지 돌꽃 발행)
돌꽃 이라는 유족회보가 발간되고 발굴작업과 함께 진상조사에도 박차를 가했다 1961.5.16쿠데타발생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하기도 전인 1961.5.16 쿠데타의 총성과 함께 그 많던 꿈도 접어야 했다 (8개 지역 유족회를 반국가행위사건으로 규정)
혁명정권은 경남북을 비롯한 8개 지역의 유족회를 반국가행위사건으로 규정하고(피학살자 114만명) 진상규명활동을 펼치던
유원식에게 특별법 6조를 적용. 사형을 권고하였다. (특별법 6조를 적용사형 언도를 받음) 전국피학살자 유족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했다는 것이 이원식의 죄명이였다. 이것은 혁명정부에게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또한번 뒷걸음질 치고있었다
(서대문형무소) 하루하루 형 집행날짜만 기다려야 하는 사형수.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고통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평생에 누구도 다 못할일을 남겨두고 차디찬 감옥, 아버지
무덤도 없이 죽어간 아내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고아아닌 고아가 되어버린 세자식에대한 걱정은 그의 옥중기록 갈피갈피마다 베어있다
어머니를 그리다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어린딸에대한 뜨거운 참회의 눈물도 생사를 도려내는 아픔으로 저몄다
(동미는 무덤없는 엄마를 찾아가 버리고 말았다. 모든 희망이 가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울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원식 옥중일기에서-)
끝없는 옥바라지와 평생을 멍에처럼 따라다니는 연좌제. 그리고 빨갱이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은 아들 이광달에게 세상을 등진채 예술활동에 매달리게 했다
1970년 4.10 10년의 형을 마치고 출소한 아버지는 73년 10월 유신의 덫에 걸려 3년의 옥고를 치른다 (73년 10월 유신의 사회안전법으로 재투옥)
그리고 출옥 몇달 후 불의의 교통사고로 영원한 자유의 몸이 되고 만다 (77년 출옥 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 한번더 역사의 중심에서 (경북 경산 백합공원)
비켜서지 않았던 아버지 경산의 공원묘지에 한점 흙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이제 아픔도 이별도 없는 그곳에서 평생을 그리던 아내와 사랑하는 딸을 만나고 있을까
아버지의 말년은 외로웠다 그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달래주었던 것은 어머니를 찾아헤매며 목놓아 부르던 그 노래였다

40년 후 아들은 학살의 현장을 찾았다 (경산 폐 코발트 광산현장) 그가 안내한 곳은 당시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되었던 경산코발트 광산현장 끝을 알수없는 어둠과 뼛속깊이 파고드는 싸늘한 냉기. 그리고 차마 숨길 수도 없는 그날의 참혹한 모습. 한숨처럼 눈물처럼 켜켜히 쌓여있는 고단한 세월 (보도연맹사건으로 3천5백명이 집단 학살된 현장) 한줌흙으로 돌아갈 호사마저 누릴수 없었는 원혼 그후 반세기 죽은자는 말이없고 살아남은 이들조차 침묵한채 역사는 숨가쁘게 달려간다.
계절이 바뀌듯 역사의 주인도 슬프게 달라졌지만 외면당한 진실은 한번도 이들을 거두어 들이지 않았다. 무명비 하나없는 차디찬 주검위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노래가락만이 구슬피 흐른다

서중석교수 성균관대 역사학과
그런 노래들 어떤 면에서는 참 슬프기도 하고 어떤면에서는 여러가지로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의 한 단면을 아주 생생하게 노래로서 표현을 한것이죠 어떻게 보면은 그당시 가장 우리 현대사의 단면을 잘 보여준 것이 이 서민들의 슬픔이 담긴 너무나도 참혹했던 비극이 담긴 그런 정서를 노래로서 표현한 이노래에서 우리역사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봅니다.

무명천 삼베옷마다 핏물범벅 부모자식 갈라놓은 생이별에도 한숨 위안처럼 입가를 맴돌던 노래 역사의 총칼앞에 침묵하며 미친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히면서도 부르고 또 부르던 노래 철책선 너머 저먼땅끝에서 잃어버린 반쪽의 고향을 찾아 지금도 소리없이 메아리치고 있을 내 어머니 노래
아직도 못다부른 그 노래들을 다시 찾아 부르는 일은 이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왔다갔습니다. 발굴당시에 그때와 약간의 유골이 좀 유실되고 그때와 약간의 변화는 있어도 그 당시와 거의 같은 현상을 하고있습니다. 어쨋든 참혹합니다. 이런역사가 다시는 없어야.. 이 다 내 부모 내 형제 아닙니까.. 이럴수가 있습니까..

기획 김재권, 글.구성 장희정, 기술 곽수남, 영상 박찬호, 음향 이준, 촬영 양장완,박승만, 오디오 이영철, 음악 주선미, 노래채보 김남채, 편곡 이호섭
노래 안치환, 이호섭, 문희원, EL POST, 신재동, 이비호 / 타이틀그래픽 노양식 / 자료협조 국사편찬위원회 여수지역사회연구소 MBC KBC
연출 김남태 제작 여수MBC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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