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由來)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초로 전주이씨가 입도하였다는 것이 구전으로 전해져오고 있으며 그 후손도 없고 확실한 고증도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전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정씨(慶州鄭氏), 남평문씨(南平文氏),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입촌 하였고, 다음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 진주강씨(晋州姜氏), 초계변씨(草溪卞氏), 경주이씨(慶州李氏), 파평윤씨(坡平尹氏), 김녕김씨(金寧金氏), 함안조씨(咸安趙氏) 등이 입촌하여 생활의 터전을 잡았다.
지명유래(地名由來)
화개산은 일명 천제봉(天祭峯)으로 불리고 있는데 돌산군지에는 일명 천조봉이라 적혀져 있으나 이는 오기이다. 삼월삼짓날 전야에 천조봉(天朝峯) 정상에 있는 제단에서 하늘의 "천제신"에게 제를 올리는 산으로써 영산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옆으로는 봉화산이 솟아있어 두산의 봉우리가 마치 말의 귀와같이 쫑긋 솟아 있으며, 주위로는 높고 얕은 산들이 병풍을 펼쳐 둘러쌓은 것처럼 마을을 빙 둘러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지맥을 통한 산세가 부락을 옹호하여 감싸고 덮어주는 정기가 있다해서 섬의 이름을 덮을 개(蓋)자를 붙여 개도(蓋島)라 이름지어 불렀다고 한다.
화개산(華蓋山)
화개산은 일명 천제봉인데 두봉이 말귀와 같으며 구름위에 솟아있다.(이는 개도)
화산(대동 큰동네, 개섬)[마을]
본리는 화개면 당시의 소재지이고, 화개면의 앞자인 화자(華)자와 산이 크다 하여 뫼산(山)자를 합하여 화산리라 부르며 개도 6개 부락중 제일 큰 부락이라 하여 대동 또는 큰동네라 부름. 1952년 지방자치제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천군 화정면 화산리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음.
웃몰[마을]
화산마을의 중간에 있는 마을.
아랫몰[마을]
화산마을의 아래에 있는 마을.
건머몰[마을]
화산마을의 들. 거너 산 아래에 있는 마을.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음.
별촌(갱난대, 운꼬지)[마을]
화산마을 북쪽 해변가에 있는 마을. 큰 마을과 떨어져 있다하여 별촌이라 부르며 해안의 사투리인 갱본을 갱난대 또는 웅꼬지라고도 부름.
대포(큰개)[개]
화산마을 앞 해안에 있는 포구. 포구가 크다하여 대포라하며 일명 큰개라고도 불리우고 현재는 간척사업을 하여 농경지 조성 중에 있음.
갱난대[개]
화산리의 앞에 있는 해안.
웃도잔개[개]
화산마을 북동쪽 약 1,550m에 있는 "개". 해안선 모양이 둥글게 생겼다하여 도장개라 하였으며 두 개의 도장개 중 윗쪽에 있음.
아랫도장개[개]
도장개의 아래에 있음.
장사넌골(뱀골)[골]
화산마을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 뱀이 많이 살았다고 함.
생대넌골(대나무골)[골]
화산마을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 시누대[세죽(細竹)]
가 많이 자생하고 있음.
너던[골]
화산마을의 서남쪽 천제봉과 봉화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 돌밭으로 수목이 없다하여 너던이라 부름.
샘골(井谷)[골]
화산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 샘이 있음.
큰골(大谷)[골]
화산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 골짜기가 크다고 함.
까끔꼴창[골]
화산부락 남동쪽에 있는 삼(까끔). 골짜기(꼴창)이라 하여 불러짐.
대밭골[골]
화산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주위. 언덕에 대나무가 자생하고 있음.
산소골[골]
화산마을에서 신흥마을로 가는 골짜기. 경주정씨(慶州鄭氏), 도선산(都先山)이 있음.
산천재[고개]
화산마을의 서남쪽 능선에 있는 봉화산 중턱 고개.
질맞이[길]
화산마을의 남쪽 감시대터로 올라가는 길이 시작되는 곳이라하여 길이 질로 변하여 질마지라 함.
흙구덕[구렁]
화산마을 앞에 있는 흙구렁. 옛날에 언 개를 묻어 간척사업을 하면서 흙을 파낸 구덩이.
바람따지[능선]
신흥마을 남쪽에 있는 산. 능선 샛바람(동풍)이 많이 닿는 곳이라 하여 바람따지라고 함.
사장나무(정자나무)[나무]
화산마을 중간에 있는 450여년생 느티나무. 이 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검은 점박이 "말"과 복녀라는 처녀와의 사이에 있었던 애정(愛情)에 얽힌 이야기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심었다는 전설이 있음.
기휘집(忌諱家)[당]
화산마을 서북쪽 봉화산 밑에 있는 기휘집. 천제를 모시기 위하여 당주들이 기휘생활을 하는 곳.
당산제각(堂山祭閣)[당]
화산마을 서남쪽에 위치하고 음력 삼월 초이튿날 밤에 당제를 내리는 곳.
감시대(監視臺)[터]
화산부락 서쪽에 있는 산(큰재). 태평양전쟁당시 연합군의 공군기 물몰을 알리기 위하여 봉화불을 피웠던 자리.
큰재(大嶺)[재]
화산마을 남쪽 천재봉산 아래쪽에 있는 산. 방언으로 "큰재몰랑"이라고도 부름.
작은재(小嶺)[재]
화산마을 북쪽 여석리 넘어가는 "산" 고개.
봉화대(봉화산)[터]
화산마을 서남쪽 봉화산(峰火山) 정상에 있는 봉화대 터. 임진왜란 당시 봉화불을 피워 신호를 하였던 터.
들안[들]
화산마을 북서쪽에 있는 들.
쇠당빼기[등]
화산마을 남동쪽에 있는 산등성이 넓은 잔디밭이 있어 목동들의 놀이터라 하여 쇠당빼기라 불러왔음.
너운당[등]
신흥마을 북쪽에 위치한 산. 정상이 넓고 평평하다하여 너운당(넓은등)이라 함.
개도제방(蓋島堤防) (언뚝)[뚝]
화산마을 앞에 있는 제방. 옛날 바다를 메워 논을 만들면서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뚝을 쌓는 것을 말함.
산바시끝[뚝]
갱난대에 있는 뚝. 일제하에 축조하였으며 일본말로 산바시라 하여 선착장 끝을 말함. 사라호 태풍때 붕괴되어 재축조 하였음.
상바위[바위]
화산마을 서남쪽에 있음.
캣지방[부리]
화산마을 남쪽 감시대 자리로 가는 산중턱에 있는 산부리. 툭 튀어나온 코 같다하여 방언으로 캣지방이라 부름.
동네산(동네까끔)[산]
화산마을 남쪽에 있는 산. 마을소유라 하여 동네산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매각하여 개인 소유가 되었음.
민제넘[산]
화산마을 서남쪽에 있는 산. 원소유자가 화정면이었을 때 면유림(面有林) 민재넘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매각하여 개인소유가 되었으며, 일부는 남아 군으로 이관하여 군유재산으로 관리하고 있음.
쌩기짐이[산]
화산마을 서남쪽에 있는 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금맥을 찾기 위하여 헤맷다하여 생금산으로 하던 것이 어원이 변하여 생기짐으로 부르게 되었음.
천제봉(천제산)[산]
화산마을 서남쪽에 있는 산. 개도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음력 삼월 이일 새벽 하늘에 제사를 지냄.
봉화산[산]
화산마을 남쪽에 천제산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산. 옛날 봉화대가 있었음.
야도(冶島)(불무도)(拂無島)[섬]
화산마을 동쪽에 있는 섬. 개도에서 관리학 있다하여 불무섬(冶)자와 섬도(島)자를 써서 야도라 불렀음.
땅썹(당숲)[숲]
화산리 407번지에 당신제(堂神祭)를 지내는 당집이 있는 숲.
호리섬여[여]
화산리와 자봉도 사이에 있는 "여". 2개의 "여"가 만조가 되면 1개의 여는 물에 잠겨 버리고 1개만 보인다고 함.
찰떡여[여]
화산리 운꼬지마을 서북쪽 해안가에 있는 조그마한 여. 파도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면서 물소리가 찰딱 찰딱 한다하여 찰딱여가 찰떡여로 변하였음.
삼샘이[우물]
화산마을 서남쪽 천재봉 하단 계곡에 있는 우물. 큰 한발이 와도 물이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있음.
개도(貯水池)[저수지]
화산리 1303번지에 있는 저수지. 1968년 축조.
나무밭밑[마을]
화산마을 512-1번지에 나무가 많이 있어 그 밑을 나무밭밑이라 하였으나 현재는 잡종지 및 대지로 지목변경되어 화산리 사무소, 개도 우체국, 개도 보건소 등의 기관이 있음.
절터골[골]
화산리 운꼬지마을 서쪽 산 603-1번지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함.
화개면터(華蓋面址)[터]
화산리 산 513-2번지에 있는 화개면사무소 터.
목장터[터]
화산마을 서남쪽 천제산과 봉화산 뒷편 중턱에 있는 목장터. 옛날 말을 기를 때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함.
심정당(터)[터]
화산마을 서쪽 들 부근에 있는 심정당의 터. 마음을 맑게 한다는 수신처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건축물이 붕괴되어 찾아볼 수 없고 터만 남아 있음.
어업조합터[터]
화산리 별촌부락 부두 장교 부근에 있는 터. 참고로 화월어업조합의 연혁을 살펴보면 1922년 3월 25일 화월어업조합이 설치되었고 위치는 현 면사무소출장소가 있는 자리였으며, 그후 1940년경에 현 위치인 산바시 부근에다 석조건물로 신축을 하여 이전을 하였다. 1972년 8월 25일 여천군 어업협동조합이 발족되고 돌산, 남면, 안도, 화정 어업조합이 합병되었다. 현재 조합터는 폐허가 되고 낡은 건물만이 옛날의 추억을 간직한채 쓸쓸히 남아 있다.
봉해정(峰海亭)[정각]
1990년 당시 개도중학교 강기중 교장이 사전을 들여서 화산부락 동쪽 약 300m지점에 위치한 경주정씨 도선산 중간지점 밑에다 과녁판을 세우고 임시궁도장을 설치하였으며, 명칭을 봉해정이라 이름지어 중앙궁도협회에 등록을 필하였으며, 가입회원 10여명으로 매년 전국 각 궁도대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있다. 1993년 여천군의 지원으로 현재는 정씨도선산 바로밑 관장에다 정각을 신축하였음.
노인정[정]
화산마을 하촌 정자나무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래 이 건물은 마을공동 구판용으로 지은 것이었으나 그후 농협분소에서 구판사업을 취급 운영하는 바람에 명칭을 바꿔 화산노인정으로 개칭 운영해 오고 있음.
정구장(庭球場)[마당]
화산마을 동쪽 약 500m 지점에 위치한 봉해정(烽解亭) 앞뜰 광장에 설치한 정구장 1993년도에 가입자의 기금으로 설치하였으며, 전통이 있는 개도 정구가 그 명맥을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기념비[비석]
1920년 무렵 여수읍에 거주하던 김한승(金漢昇)씨가 당시 여수군청 수산계에 근무하는 임두실씨의 지도를 받아 개도에서 대밭 약간을 이식해 와서 개도 앞 바다에 처음으로 "김"인공양식에 성공하여 해태양식을 해 왔었는데 그 당시 양식장 소유권 문제에 있어서 부락민과의 사이에 상당한 시비가 있었다. 결국은 김한승씨의 양보로 일체의 자재를 비롯하여 제반기구와 부속건물까지 양도를 해줌으로써 여명기의 이 고장 해태양식 발전에 공헌하였다. 부락인도 그의 공덕을 길이 새기기 위하여 1933년 2월 화산마을 정자나무 옆에 지방민의 공의 미덕을 공덕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봉화대
옛날에는 봉화산 정상에 봉화대터가 선명히 남아 있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풍우와 계절의 변화로 점차 그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전 임진왜란 당시 고흥 팔영산 봉화대로부터 봉화불이 오르면 이곳 봉화대에서는 즉각 남면 금오도 봉화대로 봉화를 올려 신호를 보냈다. 금오도 봉화대에서는 돌산 봉화대로, 돌산 봉화대에서는 여수 종고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峰燧臺)로 연락을 하여 좌수영 본영에 급보하여 서남해방면(西南海方面)의 왜구 군선의 출몰을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한다.
목장터[牧場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전주이씨가 최초로 입도(入島)하여 말을 사육하였다는 것이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다. 분명한 것은 전란때에 사용할 군마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목장이 생겼고, 이 목장의 관리는 감목관을 겸한 순천부감을 두고 철저하게 관리를 하였다. 지금도 목장터가 천제봉 뒤산중턱에 남아있음.
보호수[당산나무]
화산마을 하촌부락 도로변에 높이 약 30m, 둘레 10m인 보기드문 느티나무 노거수(老巨樹)가 있는데 식수년도는 정확치는 않으나 전하는 구전으로는 600년수로 불리는 것으로 보아 약 700년전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주위에 자은 3그루의 느티나무는 해방직후에 식수한 것으로 군을 이루고 있으며, 풍치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여름철이 되면 복더위를 달래는 데는 천하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