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由來)
임진왜란 당시 성주배씨가 정착지를 찾아다니면서 이곳을 지나다가 해초류가 많이 있음을 발견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으로 입도하여 정착하였다. 그 후 인동장씨(仁同張氏), 전주이씨(全州李氏), 김녕김씨(金寧金氏), 함안조씨(咸安趙氏) 등이 차례로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입향 시조인 성주배씨(星州裵氏) 묘가 현재 시루섬에 있으며, 현재는 성주배씨(星州裵氏)와 함안조씨(咸安趙氏)는 일가구도 살고 있지 않다
지명유래(地名由來)
지형의 형세가 소의 머리같이 생겼다하여 소섬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으며 섬 전체가 진달래꽃과 선모초의 꽃으로 만발하여 꽃섬 웃꽃섬이라 하였으며 윗상(上) 꽃화(花)자를 써 상화리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왕머들[개]
상화마을 서쪽 해변가에 있는 개. 큰 자갈이 많고 듬성듬성 하다고 함.
꼴창[골]
상화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 계곡이 깊다고 함.
당산골[골]
상화마을 당산 옆에 있는 골.
물내리골[골]
상화마을 안에 있는 골짜기. 비가 오면 빗물이 이곳으로 흘러내린다고 함.
큰골[골]
상화마을 서쪽 수쿠덩 근처에 있는 골로서 물이 흘러 깊은 골이 생겼으며 상화에서 제일 골임.
매무적[터미]
상화마을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동학란 당시 피난민이 와서 돌을 던져 돌이 많이 쌓여 있음.
산밑[들]
상화마을 동쪽에 큰 산밑에 있는 들..
당산[당]
상화마을 앞에 있으며 예전에 음력 정월 보름 제를 지냈음.
과부등[동]
상화리 동쪽 약 400m 지점에 있는 동. 옛날 어떤 여자가 남편이 죽어 혼자 살기 어려워 자살했다는 전설이 있음.
요막등[동]
상화마을 남쪽에 있는 등. 옛날 도깨비들이 춤을 춘 곳이라고 함.
감지다리[목]
상화마을 서쪽에 있는 목. 건너바위와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함.
선바구등[등]
상화마을 남쪽에 있는 바위. 바위가 서 있는 등이라고 함.
부덩이널방[바위]
상화마을 북쪽에 있는 바위. 부엉이가 앉아 울었다고 함.
돌팽바구[바위]
상화마을 서쪽에 편편하여 놀기 좋은 바위. 돌 사이에 팽나무가 끼어 자라고 있음.
장안[버덩]
상화마을 동쪽에 태풍시 선박을 대피시키기 위하여 쌓은 장을 말함.
엉덕뱃밑[버덩]
상화마을 서북쪽에 있으며 엉덕밑에 배를 정박시키는 버덩.
동끝[벼랑]
상화마을 동쪽 끝에 있는 벼랑.
낫끝[벼랑]
상화마을 서쪽 끝에 있는 벼랑. 지형이 낫같이 생겼다고 함.
큰산[산]
상화마을 뒷산에 위치하며 제일 큰 산.
중산[산]
상화마을 동쪽 중간에 위치하며 옛날엔 음력 1월 14일 산제를 모시고 귀신들이 먹을 물밥을 묻는 곳이라 함.
정강산[산]
상화마을 북쪽에 있는 산으로 정강산이라 부르는 이류를 아는 이는 없고, 일제 때 지형 세부 측량시 측량 지점이 지금도 남아 있음.
상계도(上鷄島)(웃닭섬 또는 진닭섬(眞鷄島))[섬]
상화마을에서 서북쪽에 있는 섬으로 닭모양을 하고 있어 닭섬이라 하며 두 개의 닭섬중 위에 있다하여 웃닭섬, 상계도라 부르고 있음.
하계도(下鷄島)(두리닭섬)[섬]
상화마을 동북쪽 약 1km 지점에 있는 섬.
진닭섬(長鷄島)(두리닭섬)[섬]
두리닭섬 옆에 길게 생긴 섬.
샘뱃밑[우물]
상화마을 서북쪽 득괴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출어하는 배의 식수를 싣고 갔다 하여 샘뱃밑으로 불림.
득괴밑[터]
상화마을 서북쪽에 있고 어부들이 출어시 그 밑에서 제사를 지내면 만선을 한다 하여 부름.
무적[터]
상화마을 남서쪽 공동묘지 바로 옆에 있으며 재앙이 있을 시 무당이 굿을 하는 곳으로 무당이 왼손에 들고 춤추는 기구가 무적이라 하여 지칭됨.
묏밑[터]
상화마을 정강산 밑에 물가 있어 불리워짐.
작은재[터]
상화마을 서북쪽에 있으며 보리타작 마당 중 작은 마당임.
잿마당[터]
상화마을 서북쪽 작은재 옆에 위치하며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하던 타작터를 말함.
수쿠덩[후미]
상화마을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쑥이 많이 서식하여 쑥구덩이라고 하였으나 어원이 변함으로 인하여 수쿠덩으로 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