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由來)
본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옥천육씨가 난을 피하기 위해 처음 입도하여 정착하였으며, 그후 나주임씨(羅州林氏), 성주배씨(星州裵氏), 김해김씨(金海金氏), 달성서씨(達成徐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순으로 입도하여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고 있음.
지명유래(地名由來)
제도의 옛날 이름은 제리도(濟里島)였다. 일명 절이도(折爾島) 저리도(猪里島)라 하였다. 섬의 형세가 제비모양처럼 생겼다하여 조선조 19대 숙종 13년 젤섬이라 부르기도 하고 제비여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1914년 여수군 화정면 제도리로 개칭하였으며 초지가 좋음으로 백야도, 개도와 같이 말을 많이 사육한 곳으로 지금도 마장산(馬場山)이 있다.
요막산(료幕山)
임란당시 외적의 침입을 살피기 위하여 산상에서 지켰던 산으로 요망산(要望山)이라 하기도 함.
큰개(대포)[개]
제도마을 앞 해상에 있는 개. 해안이 커 선박 대피 장소로 활용.
하늘땀[개]
제도리 서쪽에 있는 푸른색 자갈로 형성된 개.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며 여름철에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하늬바람(북서풍)이 심하게 부는 곳.
후포(언뚝망)[개]
제도마을 뒤에 있는 개. 일제시대 간척되어 현재는 농토로 활용되고 있음.
뒷개(언안)[개]
제도마을의 서북쪽 해안에 있는 개. 마을 뒤쪽에 있음.
각시굴[굴]
제도마을 뒤 해안에 위치한 조그마한 굴. 들어가면 새색시의 장롱과 옷을 걸어두는 옷걸이 같은 바위가 있어 새색시 방같이 생겼음.
시집골[골]
제도마을 앞 산등성이에 형성된 들. 들의 경사도가 심하고 이곳까지의 도로가 험난하여 이 길에 익숙치 못한 색시들이 일하는 농부들의 먹을 것을 가지고 가기가 시집살이 만큼 고생스럽다하여 부르게 됨.
하당(사장뚝)[당]
매년 음력 3월 3일이면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비는 마지막 제당으로서 당집은 없으나 주당에서 지은 밥으로 돌밑에 묻었다고 함. 여름철이면 주민들의 휴식처로 활용되기도 함.
중당(굴시당)[당]
당집 중 가운데 있는 당으로서 지금 당집은 없고, 당집터만 남아 허물어져 가는 것을 1984년 다시 신축 오늘에 이름.
상당[당]
3개의 당중 제일 위에 있는 당.
방파제(언뚝)[뚝]
제도마을에 있는 방파제.
제리도목(하늘담목)[목]
제도마을 뒤에 있는 목. 목이 가까워 간척사업하기 좋은 위치에 있음.
대리바위(다리바위)[바위]
백야도와 제도간 교통수단인 나루를 건너기 위하여 나룻배를 기다리며 앉았던 바위.
선바(선바위)[바위]
제도마을 남서쪽으로 마지막 해안가에 있는 바위. 바위가 서 있는 것 같이 생겼다고 함.
얼룽바(얼룽바위)[바위]
제도마을 서북쪽에 있는 바위. 바위의 색깔이 붉은 색과 검정색으로 되어 있음.
정삼품 배공 맹온처 김씨 공적비(正三品 裵公 孟溫妻 金氏 功績碑)[비]
제도마을 282번지에 있는 배맹온처 김씨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
조공형민(趙公亨敏)의 시적비(施績碑)[비]
당시에는 개도 화정초등학교학생 도선으로 독학은 물론 가난한 섬 주민들의 왕래를 무료로 10년간을 건너 주면서 도선부 노임을 매년 보리 10가마씩 주어 그 고마운 뜻을 기리는 시적비. (通政大夫 前議官 趙公亭敏 施績碑 開國 五百四年 11월 15일)
시근등[산]
제도마을 북쪽에 있는 산. 마을에서 제일 높고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제도리의 근본이 되는 산.
욤막산(요막실)[산]
제도마을 서남쪽에 있는 산. 산에 올라가면 사방이 한눈에 보인다고 함.
가문여[여]
제도마을 동북쪽에 있는 여. 물이 나가면 바위가 보이고 물이 들어오면 바위가 가물가물 보인다고 함.
큰여[여]
제도마을 앞 해상에 있는 여. 제도에서 제일 큰 바위로 된 여이며, 썰물때는 육지와 연결이 된다고 함.
묵여[여]
제도마을 앞에 있는 여. 사람의 목같이 생겼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