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由來)

이 마을은 동학전쟁 당시 안덕양에 살던 임경문(林京文:羅州林氏)이 1594년경 난리를 피하기 위해서 일가족을 데리고 이곳에 제일 먼저 정착하였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이 다음으로 온 사람들이 광산김씨(光山金氏)와 전주이씨(全州李氏) 등이 두 번째로 들어왔으며 세 번째로 밀양박씨(密陽朴氏), 경주이씨(慶州李氏) 등이 이주해 옴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때에 들어와 소라공립보통학교가 여수군 육지부에서는 제일먼저 들어서고 덕양우편소가 생기고 소라면사무소가 관기리에서 이 마을로 옮겨왔으며 고뢰공장 출장소가 문을 열렸고 전기불이 제일 먼저 들어왔으며 세동시장이 개장되고 소라금융조합이 설립되는 등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옴으로써 일제때는 천하의 세동(細洞)으로 이름이 높았었다. 그 밖에도 세동이 또 하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세동의 벚꽃 때문이기도 했다. 세동입구로부터 역의암에 이르는 도로 양쪽에 빽빽이 들어찬 벚꽃 나무는 4월10일경 꽃이 만발하면 그야말로 천진난만(天眞欄漫) 하늘을 가리고 터널을 이루어 천하에 이름이 높이 전국에 널리 소문 났었다.

지명유래(地名由來)

1925년 대포 간척지가 조성되기 전까지는 지금의 국가지원지방도 22호선 밑으로는 온통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갯뻘이었다. 그런데 고뢰농장에서 농토를 만들기 위해서 대포리 장전에서부터 삼일면 화치에 이르는 구간의 뻘바닥을 막아 500정보의 농토를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의 세동부락이 태어난 것이다. 그때까지 하세동은 그 일대가 거의 갈대밭이어서 상세동으로 올라가는 땅바닥이 가늘다는 뜻으로 가늘세()자와 마을동()을 써서 세동(細洞)이란 이름이 붙게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