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由來)
이 마을은 원래 양지골이나 음달골로도 불리워 왔었는데 햇빛이 잘 들어오는 북쪽 산비탈이 양지골이며 햇빛이 잘들지 않는 남쪽 신비탈이 음지골이다.
지금의 국가지원지방도 22호선 자리가 원래 갯가였을 때 이 중승골은 간신이 바다에서 벗어난 육지 땅이어서 동네 일대가 모두 들판이었다. 그래서 대포 간척지가 조성된 뒤 이성백(李成柏)을 비록한 10여 가구가 농토를 따라 이마을 북쪽 산비탈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일제때에 들어와 일본인 니시사와(西澤)가 유일하게 북쪽 음달에 이주해와 터를 잡고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살았는데 덕양2구는 일제때부터 상가(商街)로 눈부시게 발전한 반면 이곳 중승골은 옛 그대로 10여호가 산비탈에 집을 짓고 드문드문 살았다.
그런데 1964년 윤상준(尹相準)이 이곳 서쪽 산기슭에 여천고등공민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의 통학로(通學路)로 마을 한가운데 도로를 내면서부터 제법 사람사는 마을다운 느낌이 들게 되었다. 그 뒤 1969년 삼일면 월내리에 호남정유공장이 들어서면서 철거 이주민 50호가 한꺼번에 집단 이주해오자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논을 집터로 다듬어서 팔았기 때문에 이 중승골이 갑자기 주택가로 화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반듯반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정말 여기가 옛날의 중승골이었던가 하고 다시 쳐다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더 박차를 가하게된 것은 몇 년전에 경성빌라와 소라맨션이란 아파트 두동이 들어서면서 갑자기 인구가 늘어나 1997.1.1분구되어 현재 덕양6구가 되었다.
지명유래(地名由來)
이 마을은 하세동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도로변에서 서쪽으로 움푹 들어간 골짜기로서 오래전부터 중승골(中僧谷)라는 이름으로 불러왔다. 그것은 옛날 이곳에 중승암(中僧庵)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유물이나 유적은 물론 아무런 기록도 발견할수 없으므로 후학들의 더 깊은 연구에 기대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