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由來)
이 마을에 제일 먼저 터를 잡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전에 충청도에서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지금은 그 후손들이 살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알수 없다.
그러나 마을뒤의 공터에는 임자없는 무덤들이 여러개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무구장들이 아마 청주한씨(淸州韓氏)들의 묘일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뒤 1698년대에 경북 칠곡(漆谷)에서 인동장씨(仁同張氏) 만홍(萬弘)이가 이주해 왔으며 같은 연대에 영암(靈岩)에 살던 김해김씨(金海金氏) 명언(命彦)이 처가 고장인 율촌 상여(栗村 上呂)에 와 살다가 화재를 만나 가재를 몽땅 태워 버리고 이 마을에 이사해 와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되던 1949년 소라면(召羅面) 죽림리(竹林里)에 살던 의령남씨(宜寧南氏) 율우(栗祐)가 바다를 따라 이곳으로 정착해 왔으며 거의 같은 때에 돌산(突山) 평사(平沙)에서 진주강씨(진州姜氏) 학룡(鶴龍)이 들어온데 이어 경주정씨(慶州鄭氏) 준향(俊享), 밀양박씨(密陽朴氏) 팔규(八圭)가 계속 이주해 옴으로써 마을이 제대로 형성돼 현재 40여가구에 인구 150여명의 주민들이 마을앞 바다를 가꾸면서 사이좋게 오순도순 살고 있다.
지명유래(地名由來)
이 마을은 마을이 형성될 때 부터 오늘날까지 활궁(弓)자와 목항(項)자 궁항(弓項)으로 일관하여 왔다. 그것은 마을의 생김새 자체가 마치 활같이 생겼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마을의 지형은 흔히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 하여 구부장한 활(弓)같이 생겼을 뿐 아니라 또 마을 서쪽 모퉁이로 돌아가면 거기도 활같이 생긴 곳이 또 있어 결국 이 마을은 두개의 활이 있다 해서 궁궁(弓弓)이 되는 셈이고 앞으로 바라다 보이는 육달천과 섬달천이 활줄같은 형국을 이루고 있어 활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을을(乙乙)은 새가 두 마리 있다는 뜻인데 이것 또한 묘하게 섬달천 넘어 바다 가운데 보일까 말까한 조그만 섬이 있는데 이름이 새섬이고 그 옆에 또 하나의 섬이 있음으로 을을(乙乙) 즉 새가 두 마리 있다는 것이다..
물이 귀한 마을
옛날부터 이 마을은 물이 귀하여 가까운 사곡에서 지하수를 끌어오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사곡에서는 지하수를 딴 동네에 빼주면 자기 부락의 물이 귀해진다고 한사코 물을 안주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할수없이 1㎞ 떨어진 망마산(望馬山) 기슭의 망곡(望谷)에서 지하수를 끌어와 집집마다 수도전을
선착장
이 마을 앞은 바로 바다인 만큼 여태까지는 마을 앞길이 좁아 겨우 두사람이 몸을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1989년 여천군 당국에서 바다를 막아 마을앞길을 넓혀주고 또한 선착장까지 만들어 주어 이 마을의 오랜 숙원이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