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位置) 및 지세(地勢)

읍소재지로부터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대복리와 동쪽으로는 작금리와 접하고 있으며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남쪽으로 남면 화태리와 마주하고 있다. 본 마을의 주산인 봉황산(일명 "상산")은 해발 440.7m이며 남쪽줄기 해안선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봉황산에서 홀러오는 수자원으로 농업이 발달하고 어업 또한 발달한 마을이다.

마을유래(由來)

마을이 형성된 것은 1770년경 경상남도 남해에 살던 김종률(金海金씨)이 장사할 목적으로 돌아다니던 중 여천군 남면에서 일시 거주하다가 돌산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정착할 곳을 찾던 중 농토가 기름지고 해산물이 풍부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7대손인 김대운이 살고 있으며 김종률의 후순으로 3세대가 살고 있다. 그후 지금부터 약 188년전 경주 정씨(慶州鄭氏) 일가가 전주에서 가세가 기울자 새로운 정착지를 찾던 중 여수를 거쳐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5대손인 정기우가 살고 있다.

지명유래(地名由來)

당초에는 지금의 대신국민학교 부근에 마을이 형성되었으나. 1780년경 해일로 인하여 바다수면이 육지보다 높은 형태가 되었는데 그 모양이 칼등처럼 생겼다하여 검단(劍端)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풍수지리학상 근내리 소재 천황산이 "검단"마을을 넘어다보고 있어서 외부에 서의 잦은 도둑침입이 있있다는 일설도 있으나 어쨌건 1910년경 마을 뒷산에 도둑이 성행하자 마을을 지금의 위치인 바닷가로 옮기면서 새로운 터전이라는 뜻으로 신기(新基)라 하였다. 이 새로운 터 신기(新基)는 전국의 자연부락의 지명(地名)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