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位置) 및 지세(地勢)
여수로부터(國道 17호선상) 동남쪽으로 12km 지점인 국도 변에 있는 마을로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봉수(峰守)마을과 접하며, 돌산도에서는 들(野)이 가장 넓은 곳이고, 저수량이 제일 많은 둔전제(屯田堤)가 있으며. 들 가운데로는 와룡천(臥龍川)이 흐르고 있다. 돌산읍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보이지 않는 마을이다.
마을유래(由來)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는 온통 간악한 왜군의 발아래 짓밟히게 되었다. 이 난을 피하여 수많은 피난민들이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지키는 전라도 쪽으로 몰려들었는데.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全羅左道水軍節度使營)에도 예외없이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경상도 수군이 전멸 상태이자 그 절반도 못 되는 전라도 수군만으로 왜수군(倭水軍)을 막아내느라 온 정력을 다 해 왜군과의 전투에도 바쁜 이순신장군이었지만 이곳 전라좌수영 근처로 몰려든 피난민의 구호를 위하여 온갖 정성을 쏟았다. 그때 영남 피난민(避難民)들 가운데 본영경내(本營境內)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약 200호(戶) 되었는데. 모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여 그 해 겨울을 지냈으나, 계속해서 그들을 구제할 길은 없고 비록 전란이 끝난 뒤에는 각기 고향으로 돌아갈지라도 당장에 굶주리게 된 형편인지라 그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하던 중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중신인 풍언부원군 류성룡(柳成龍)과 그의 친구분들에게까지 서신을 보내어 백성들의 딱한 사정을 알리었다. 그 때문에 비변사라는 관청에서는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있거든 여러섬 중에 피난하여 있는 피난민들을 들여보내 살 수 있도록 하되 그 실정이 백성들에게 유리하도록 잘 판단해서 하라는 영(令)을 내렸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피난민들이 거처할 곳으로 돌산도를 정하여, 1553년(선조 26년)1월 26일 전라좌수영 본영의 경내에 거처하던 경상도 피난민 200호(戶)를 좌수영 남쪽지역의 목마장(牧馬場)이던 돌산도에 이주시켜 농사를 짓도록 영(令)을 내려주기를 청하는 글(狀啓-상계)을 조정 (朝廷)에 올렸다. 돌산도는 본영(本營)과 방답진(防踏鎭) 사이에 있고, 나라의 목마장(牧馬場)일뿐 아니라 국둔전(國屯田) 터가 있는 곳이어서 보통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이 피난민들을 돌산도에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피난민들의 생활의 길을 열고, 한편으로는 군량(軍糧)을 확보(確保)하는 일석이조(一石二烏)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본래 전라좌수영 남쪽에 위치한 돌산도는 지역이 넓은데다 땅이 비옥할뿐더러 산세가 첩첩이 둘러싸여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는 안전한 곳이기 때문에, 피난민들은 들어가서 이곳을 개척하여 농사를 짓게 하더라도 목마장(牧馬場)에서 말을 먹이는데 해가될 일이 없을 것이므로, 말도 먹이고 백성도 구제함과 아울러 전라 수영의 군량확보책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후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이순신 장군의 계획대로 실행토록 령(令)을 내렸다. 이와 같이 경상도 피난민들이 돌산도에 들어와서 살 수 있도록 조치(선조 26년 1593년)하고, 그후 노약한 군사들을 제대시켜 국둔전을 경작케 하였는데 그때 입주한 피난과 제대한 군사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마을을 형성. 둔전리(屯田里)라는 지명(地名)과 함께 그들의 후손인 문(文) 박(朴) · 김(金) ·주(朱) · 강(姜)씨 등이 살고 있으며, 밀양 박씨(密陽朴氏) 족보에 의하면 박상동(朴相東-明聖)께서는 임란을 당하여 돌산 둔전리에 거주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지명유래(地名由來)
조선시대 임란당시 국둔전(國屯田) 터로 경상도 지역 피난민과 병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어 나라에 바치게 하였으며, 이 국둔전 터의 이름을 따서 둔전리(屯田里)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