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승지
상세설명
여수시 여천동 868번지에 위치한 여수 석보(麗水石堡)는 시청에서 북쪽으로 약 2.8km 거리에 있다.
17번 국도를 따라 여수반도를 들어오다 보면, 여천 초등학교를 지나 도로가 8차선으로 넓어 지는 부분이 있다.
작은 여천교를 지나면 바로 석창사거리에 다다르게 된다.
이 석창사거리에서 여수시청방향으로 우회전을 하면, 바로 조금 큰 돌로 이루어진 석축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여수 석보'이다. 행정구역상 '석창'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주변은 모두 '성내마을' 또는 '석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여수 석보’는 조선 시대(15세기 중반) 널리 활용되었던 산지(山地)나 평산(平山)지역이 아닌 평지(平地)에 축조된 방형(方形)의 성곽시설인데, 2차례의 발굴조사와 학술대회 등을 통하여 유적의 성격을 확인하였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방어위주의 석보(石堡·돌로 쌓은 성)에서 출발하여 점차 관청용 물자비축의 창고(倉庫)와 장시(場市·시장) 기능으로 활용되는 등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어 더욱 주목되는 유적이다.
또한 체성부(體城部·성벽의 몸체 부분)와 해자(垓子·성 주위에 둘러 판 못)의 잔존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15세기 중반 평지부에 방형으로 축조된 육군 진보(鎭堡·각 지방을 지키던 군사조직이 주둔하던 소규모의 성)로서 전 구간에 걸쳐 첫째 단을 세워쌓기한 점, 대형의 지대석을 사용한 점 등 여수 석보는 역사적으로나 성곽사적으로 다른 성곽에서는 찾기 힘든 시대적인 한정성과 사례의 희소성을 지닌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 비석 2기가 서 있는데 하나는 지붕이 없다.
이것은 원래 성밖 여수로 들어가는 구 도로 곁에 있었던 것인데 1985년 옮겨 놓은 것이다.
비문에 "節度使 李公寅熙 永世不忘碑(절도사 이공인희 영세불망비)", "節度使 金公魯甲 恤民善政碑(절도사 김공로갑 휼민선정비)"라 기록되어 있으나 글을 알아보기가 어렵다.
조선시대 여수 석보의 주변 환경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일본이 건설해 놓은 십리방천(하치 첨산에서 삼간도 애양원쪽으로 건설된 긴 방축)때문에 바닷가에 있었던 석보의 주변은 벌판이 되었다.
당시 석보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16~17세기 여수․삼일포․소라포 환상곡을 수납하던 창고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19~20세기 장시로 활용되었는데, 석보 밖에 생긴 '석보촌'이라는 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장인들이 기거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1987년 1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받았을 당시에는 성 안에 마을이 있었으나, 발굴과 복원을 위해 철거되었다.
2012년 6월 22일 유적의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 사적 제523호로 승격되었다.
이용안내
개방시기/휴무일 | 개방시간 : 00시~00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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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요금 | 무료 |
주차시설 | 주차요금 : 무료. / |
유모차대여 | 없음 |
장애인시설 | 없음 |
외국어서비스 | 불가능 |
휠체어대여 | 불가능 |
반려동물 입장 | 불가능 |
부대시설/인접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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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정보 (주변2km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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