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및 지명 유래(由來)
조선의 세종대왕때에 동래, 울산, 창원의 삼포를 개항 일본과 통상을 하기로 약정되자 지정항 이외에 음밀히 기항을 수행하였다. 그후 외적의 방비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기 위해 당시 봉산리에서 현재 국동에다 국포만호를 두었다. (현재 남국민학교뒷편) 그리하여 국포만호는 지역적으로 국방상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그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여수에 도임하여 관방이 되었다 하여 당시의 국포(菊浦)를 국개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5. 16혁명후 1967년 1월 1일 법정동으로 확정됨에 따라 국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국포(菊浦)
동학란 당시 이마을이 형성되어 해방후엔 30여 세대가 생계수단의 원시적인 소타래망(10여척) 3톤 정도의 목선(손어장)으로 (조류를 이용 고기를 잡는배) 해안의 구역에서 고기를 잡고 배가 닿기 좋으며 방지로서 풍수해의 포구지역이라 하여 국포라 불리었다고 한다.
국개마을
국동(菊洞)
국개(국포)
국동 앞에 있는개로 조선때 내례포 만호(內禮浦 萬戶)가 있었음.
국포(菊浦)마을
국동(菊洞)
국포(菊浦)
국개
국개나루(국포진)
국개에 있는 나루터로 경도로 건너 다녔음.
참경도(斬鯨島)
국동 남쪽에 있는 작은심으로 이곳에서 고래를 잡았다고 함.
넘너리(봉양리)마을
국개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잘룩한 목너머가 된다하며 구봉산의 남쪽이 된다.
떡샘골
구봉산 기슭아래 10여 세대가 촌락을 형성 거주하면서(현재 국동 대한 노인회 여수지회 뒷편 5미터 떨어진곳)흐르는 물이 깨끗하고 "물맛이 떡과 같이 맛이 좋다하여"주민들이 보수하여 정(亭)을 이루어 떡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78년경 국동 IBRD차관 주택단지 조성으로 각 가정에서 나온 폐수및 오염물질로 인하여 먹지못하고 방치되어 오다 79년도 마을 공동으로 빨래터로 이용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인근 주민 100여 세대가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