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목
망마산
마을 뒷산이며 대인산의 지룡으로 높이는 142m이다. 이순신 장군이 군사훈련이나 작전 상황을 살펴 보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웅천도로 개설로 목부위가 절개되어 독산(獨山)이 되었고 서북편엔 2개의 봉우리가, 동남편으론 4개의 산마루가 있어 웅천의 남촌마을과 도리매, 지망이, 동녕등 등을 안고 있으며 정상엔 팔각정이 세워졌다. 1957년10월 18일 10시쯤 망마산에 이상한 울음 소리가 났으며, 그는 시전동장 서한철에게 보고하고 서동장은 이를 거북선보존회에 통보 하였으며 동위원회에서는 산제를 모시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턱구배미
부락의 서북쪽 끝부분에 있었던 논필지로 샘이 있었고 주위에 팽나무가 있었다. 턱구는 덕구인 것 같으며 "덕"은 여러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언덕이나 구릉(丘陵)등을 나타내기도 하고 높고 평평한 곳을 "덕"이라고 했는가 하면 터(基)나 큰(德)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구"또한 언덕(邱)이나 고랑(溝)또는 입구(入口)를 말함이고 "배미"는 전답의 필지이므로 턱구배미의 뜻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사장터
마을의 서쪽어귀 큰마을과 작은마을 중간 고락산 계곡에서 발원된 소하천위에 있었다. 양쪽 냇가를 자연석으로 쌓고 그위에 올려진 돌다리로서 길이 2mX너비 2m 두께25cm의 4각형이였다. 북락의 서남편을 내왕(來往)키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으며 선소주민이 많이 이용했다 하며 지하에 매장돼 버려 보존치 못한 것이 아쉽다고 김건욱웅은 한탄한다.
기전
부채산
마을의 서편에 있으며 부채같이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나 웅천쪽에선 대인산이라 부르지만 이곳에서는 이와 같이 부른다. 산의 높이는 205m이고 본산앞에 여러개의 산봉우리가 있어 옥녀유방형(玉女乳房形)에 비유하기도 한다.
등등골
부락의 서편골짜기로 고락산의 해발 l00m의 두줄기 능선이 만든 계곡이다. 시목 저지가 있었으며 계곡의 넓이는 400m였고 길이는 1.00km에 달했다. 시전동 109번지 일대로 여천경기장이 있으며 30.896㎡의 대지에 9.938㎡의 건축면적을 가졌고 수용인원 20,000명으로 1988년 2월 착공하여 1997년 2월에 완공하였고 18억원의 사업비가 투자 되었다.
서재골
신기 4거리에서 여수향의 좌측 골짜기이다. 서당이 있었기로 붙여진 지명이며 지금의 우미아파트 좌측 계곡이다. 전에는 송림이 울창했고 맑은 개천도 흘러서 풍류객과 선비들이 즐겨 찾았다 한다.
서골
마을의 동남쪽 웅천향의 도로 입구에 있는 바위들로서 일명 돌넘이라고도 불렀다. 마을을 지켜주는 바위라고 믿어왔으며 통행인의 휴식처가 되기도 했었다. 시전동장 서한철이 다른곳(신기동 113-1번지 공원내)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선소
산주골
마을입구의 좌측 첫번째 골짜기이다. 망마산의 북서향 능선중의 높은 봉우리가 만든 계곡이며, 계곡을 향할 때 우측엔 경사가 급하며 나무가 많고 좌측 즉 신화 아파트쪽은 경사가 완만하고 계곡의 각도도 넓다. 입구에서부터 좌측능선엔 밭으로 일구어쳤고 산주가 살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큰샘꼴창
마을입구 좌측 두번째 골짜기로 바다에 면한 봉우리와 산주골을 만든 높은 산마루가 만든 계곡이며 바로 동네뒤에 있어 동쪽에 있는 민가들은 계곡의 깊숙이까지 들어갔다. 계곡은 오를수록 가파르며 민가가 끝나는 지점에 4m X 4m의 부지에 샘이 있으며 전부터 있었던 것을 1971년 3월 2일 보수 준공했다. 고지대지만 수량(水量)이 많은 것이 특이하다.
당산
마을의 서편 바다에 면한 산마루이다 정상에 큰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 판석을 설치했다. 전시에는 승리를, 평시에는 국태민안을 기원했던 공적제향소 였으며, 군용기지 폐쇄 이후엔 마을의 안녕과 풍년, 풍어를 기원하는 당제로 변했고, 음력 정월초이튿날엔 제사를 모시고 3일에는 헌식제를 모신다고 한다.
아랫장터
1920년을 전후해서 축조된 마을입구의 방조제였다. 석보장터의 하나로 용기의 것을 웃장터라 하고 이마을 것을 아랫장터라 불렀다. 용기의 안 방천과 바깥 방천이 막아진 후 이곳의 장이 번창했으며, 도로의 양편에는 상설점포도 있었다한다. 1930년 3월 여수의 동정시장이 개설된 이후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