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유래(由來)
서기 1550년경 순천시 해룡면 가산리에서 살던 달성서씨인 서득선(徐得善)이 입향하여 최초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그 후 밀양박씨, 김해김씨, 진주강씨 등이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달성서씨가 들어오기 전 기(奇)씨, 해주 오(吳)씨가 살았다는 설(設)이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기씨, 오씨가 한 사람도 살고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려움.
지명유래(地名由來)
조화(稠禾)
우리고장의 많은 마을 지명은 산세를 보고 명명했으나 조화리는 당시 득실, 동교, 장천,사항,마을로 당시 바다를 접하고 있는 마을들은 바다에서 얻어진 수입은 생계유지의 수단은 되었으나 큰 생산은 없었던 시절이었는데 득실과 동교의 논농사 들을 보고 벼가 衣食住 중 가장 중요한 食을 해결시키고 장래 주 소득원이 될 큰 생산이 있을 것이라 하여 조화(조밀할 稠 벼禾)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리고 원조화(득실)을 조화1구로, 여흥을 조화2구로 분구를 시켰다 한다.(여흥 주영옥씨 제언)
득실
국사봉 왼쪽 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지형이 마치 바다에 사는 게의 형태라 하여 얻을 득 득실(得實)이라 칭하였는데「실」은〔谷〕에 대응되는 지명으로 육지의 지명에는 많이 나타나나 해안지방에는 극히 희소함이 육지와 다르다〔골〕은 도서 내륙지방에,〔실〕은 내륙산간지방(內陸山間地方)에 훨씬 우세하다. 해안지방에는〔끝〕이 훨씬 우세하다 하여 득실(得實)은 그 후 행정지명으로 한일합방후 1914년 토지 세부 측량시 지명을 조화(稠禾)라 칭하게 되었음.
뫼갓목
국도 17호선 취적에서 구 도로를 타고 마을 입구로 (커브길)들어오는 입구가 뫼(山)가에 있는 게발 등 형세라 하여 뫼갓목이라 부르는데 73년전 철길이지나 가면서 맥이 잘렸다고 전해 온다.
윗동네(웃돔), 아랫마을(아랫돔)
전라선이 마을 중앙부를 통과하고 있어 철도 위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북당샘 주위로 윗동네(웃돔)라 부르고 철길 아랫마을로 큰샘주위로 아랫마을(아랫돔)이라 부르고 있다.
뒷게(後浦)
마을 뒤에 있는 간척들이라 하여 뒷게라 한다 약 68년여전에 일본인 사업가 궁전(宮田次郞)이가 제방축조로 인해서 조화 간척지가 형성되었다.
뒷동네(뒷돔)
마을 북쪽 언덕에서 바다 끝 줄바위가 있는 곳까지로 마을 뒷동네라하여 뒷돔이라 부른다..
학교등(학교터)
뒷돔 뒤의 정사각형의 밭으로 1928년에 보통학교(4년제)가 설립되어 1938년에 6년제로 되었다가 이듬해인 1939년에 현 .여흥 1구 율촌초등학교로 이전하였는데 현재 그 자리를 학교밭이라 부른다.
대밭두목
국도 17호선 조화승강장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목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에 대나무가 많아서 대밭두목이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시름판 언덕(시름판 몬당)
국도17호선 위 문씨제각 뒷편의 산(조화리 산 22번지)으로 예전에 씨름을 하였던 장소로 현재는 토취장으로 흙을 사용하여 평지가 되어 있다.
영당(禾谷祠)
마을내 큰샘 인근에 달성 서씨 제각을 영당이라 부른다 일명 화곡사라 칭한다.
모치(砂置)나무
마을 바닷가에 있는 당산나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노는 장소다.
조산바위
가장넝굴 건너편에 있는 산같이 생긴 바위라고 하여 조산바위라 부르고 구전에 의하면 그곳에 한림학사 오씨 가문이 석조물위에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가장등(佳長登:가장넝굴)
마을 앞 바닷가에서 외진쪽의 능선을 가장등이라 하는데 득실마을 양끝의 두개의 혈이 있는 데 가장등이 좀 더 길게 뻗어 있어 아름다울佳 긴長 오를登이라 불러오고 있다.
모래등(몰게등)
마을 바닷가에서 1키로 정도 구멍바위 쪽으로 가면 모래등이 있어 모래가 바닷물에 밀려서 모래가 쌓여 있어 몰게등이라 부른다.
구멍바위
마을 앞 바다 가운데 있는 큰 바위로 사람이 두서너명정도 비를 피할 수 있는 두개의 바위가 구멍이 나있는 것같이 맞대고 있어 구멍바위라 부른다.
줄바위
모치나무 밑에서 바다양식장으로 가는 입구에 있는 바위로 마을의 형태가 오른쪽 가장등 보다 지세가 약해서 인력으로 바위를 운반 조성하여 지세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바위가 줄줄이 놓여 있어 줄바위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