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동부지역 학살지
- 날짜
- 2021.10.13
- 조회수
- 974
- 등록자
- 윤성현
지역구분 (행정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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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가. 순천시
1) 순천 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
○ 위치: 순천시 중앙로 255(매곡동)
1935년 우석 김종익 선생의 기부로 세워진 순천 최초의 공립학교였던 순천 농림중학교는 1948년 여순사건의 참화를 입었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하며 봉기한 14연대를 토벌하고자 서면 학구를 거쳐 순천에 진입한 토벌군국군 제2, 3, 12, 15연대의 주둔지였다.
진압부대는 이곳에서 연행되어 온 읍민을 고문, 취조한 뒤 학교의 북서쪽현 대학본부 부근의 도랑과 북동쪽 석현천 제방 부근 등에서 처형하였다. 미국 라이프지 기자 칼마이던스가 이곳의 참상을 기록 사진으로 남겼다.
2) 조곡동 둑실마을 안골현 정원넥스빌, 금강메트로빌 근처
○ 위치: 순천시 중앙로 255(매곡동)
진압군경은 읍내 민간인을 순천북국민학교북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였다. 봉기군에게 협조한 민간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주로 외모,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모략, 강요된 자백이었다. 객관적인 조사도 없이 ‘손가락총’으로 분류되고 그 자리에서 총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면단위 경찰지서에서 의심받는 민간인을 체포하여 폭행이나 물고문, 전기고문을 한 후 즉결처형하거나 순천경찰서로 보냈다. 경찰서에 갇힌 이들은 강제로 동원한 민간트럭에 실려 죽도봉 안골에서 400여명이 총살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경찰 사격장으로 이용되었던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된 현장이다.
3)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인근
○ 위치: 순천시 수박등1길 이수중학교 운동장(생목동)
생목동은 말라가던 나무를 주민들이 살려냈다는生木 당산나무가 있고, 그 뒷산은 성황당산으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올렸던 유서깊은 마을이다. 하지만 1948년 여순사건 때 마을의 서쪽 등성이에 있던 공동묘지에서는 억울한 죽음 앞에 울음소리마저 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고 봉기한 14연대 군인들에게 동조했다고 하여 진압군경은 장환봉 등 순천철도국 소속 기관사 등 30~40명을 1948년 11월에 이곳에서 총살하고 불태웠다. 민간인에 대해 영장 없는 연행과 구금, 증거도 없이 재판하여 살해하는 불법행위를 한 점이 인정되어 2019년 3월에 대법원으로부터 재심하도록 결정되었다. 한편, 좌익에 협력한 것으로 오인 받은 해룡면 용전마을 주민 일부도 여기에서 희생되었다.
4) 순천 북국민학교현 북초등학교
○ 위치: 순천시 북정2길 20(매곡동)
1939년 4월에 개교한 초등학생 배움터는 1948년 여순사건 때 삶과 죽음이 순식간에 결정이 되는 공포의 공간이 되었다. 제주 동포 학살을 거부하며 봉기한 국군 14연대를 토벌한 다른 국군 부대와 경찰은 10월 23일과 24일 부역혐의자를 찾겠다며 순천 읍민을 이곳에 모이게 하였다.
경찰・우익 학생과 청년・지방 유지를 앞세워 혐의자를 가리키는 순간 총살 내지 처벌 대상자가 되었기에 이를 ‘손가락총’이라 불렀다. 협력자로 분류된 지역민은 학교 부근이나, 가까운 골짜기로 끌려가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최후를 맞았다. 10월 24일에는 순천지검의 박찬길 검사가 인민재판장을 했다고 조작하여, 20명과 함께 교정에서 학살하였다. 북초등학교는 반군 진압 이후에도 한동안 경찰 부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5) 구랑실재
○ 위치: 순천시 서면 압곡리 용림마을 입구매천로 압곡육교 옆
구랑실은 순천 서면 삼거리에서 구상리와 광양으로 넘어가는 주요한 교통로였다. 변두리를 잇는 정겨운 길은 피학살자의 수송로가 되었고, 포근했던 골짜기와 능선은 학살지와 매장지가 되었다. 1948년 10월 23일과 24일 순천북초에서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순천읍민을 이곳에서 학살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순천과 광양경철서가 소집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한 곳이기도 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어서 시신이 쌓인 골짜기라는 의미로 ‘송장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고속국도 공사가 많이 진행된 시점에 발굴을 하였지만 유해 1구와 신발을 수습하는데 그쳤다.
6) 매곡동 학살지
○ 위치: 학살지 - 순천시 매곡동 매산중학교 옆 / 희생자 무덤 - 순천시 매곡동 경로당
군산에서 파견된 12연대 진압군은 22일 오후 5~6시경 매곡동 매산등 선교부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매산등 당산나무 아래 동네에서 우선 젊은이나 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을 수색하여 매산중학교 울타리까지 올라가게 했다.
진압군은 30여명의 민간인들을 매산등 당산나무 근처 매산중학교 철조망 울타리 근처로 모이게 한 후 울타리를 넘어 매산중 교정에서 엎드린 상태로 몸수색을 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다시 울타리를 넘게 하였으며, 그 상태로 위쪽으로 10여 미터 올라가서 운동장 쪽을 향해 멈추게 한 후, 등 뒤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살하였다.
이후 학살지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순천 선교부 소유의 밭 구덩이에 묻혔다. 미국인 선교사 보이열 목사는 4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집단으로 매장한 곳은 양성호의 부모가 경작하던 밭으로, 원래 그곳은 밭 언덕에 인접하여 물이 고여 있다가 가을이 되면 마르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물이 고이도록 웅덩이를 파놓았던 지점이었다. 30여명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하여 짧은 시간에 땅을 파기가 어려워서 기존에 있었던 웅덩이 주변을 곡괭이로 정비한 다음에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 광양시
1) 반송쟁이(덕례리)
○ 위치: 광양시 광양읍 덕례리 주령길 13-12
여순사건이 일어난 직후 광양경찰서는 경찰병력 1개 중대를 차출해 순천으로 보냈으나, 순천에 진입하기 전에 14연대 봉기군에게 기습당해 경찰 3~4명이 희생되고 광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각 지역에서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된 시점인 1948년 10월 말경, 광양지역의 여순사건 부역혐의자 30여명을 색출하여 광양읍 덕례리 반송재에서 집단 사살하였다.
당시 희생자의 현황은 광양지역 출신인 사진작가 이경모의 사진을 통해서 반송쟁이와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이경모 기자의 친구였던 김영배당시 21세는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상황이 안정되면 상경하려고 고향에서 공부하던 중에 부역혐의자로 몰려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2) 우산리 쇠머리
○ 위치: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쇠머리
1949년 9월 16일, 14연대 군인들과 지방좌익으로 구성되어 백운산에 주둔한 빨치산들이 광양읍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생 직후인 9월 17일 광양경찰서의 경찰은 읍내 주민들을 광양읍사무소 광장 앞에 집합시키고, 이들 중 약 40명을 광양읍 우산리 일명 ‘쇠머리’로 데려가 집단으로 학살했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20여 명씩 사람을 실은 트럭 2대가 도착하고 포승줄에 묶여있던 탑승자를 내리게 하더니 종대로 사람을 세우고 총으로 사살하였다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자에게 증언하였다.
3) 솔티재
○ 위치: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 솔티재
1948년 11월 11일 봉강면 지곡리의 선동 적임자로 거론된 조용래씨를 비롯한 10여명은 광양읍 사곡리 솔티재로 끌려가 집단으로 사살 당했다. 당시 대한청년단원으로 연행과정에서 조용래의 시신을 목격한 정OO씨당시 25세는 부면장이었던 조용래가 전단지 배포를 거부했는데도 경찰에게 연행되었다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진술했다. 솔티재에서는 1949년 9월 21일에도 경찰토벌대가 옥곡면 묵백리의 변은약, 이강현, 이만수 등 30여명의 민간인들을 끌고와 집단학살하였다.
4) 탄치재와 고축골
○ 위치: 광양시 진상면 탄치재
여순사건 발발 후인 1948년 11월경 광양시 진상면 지역의 좌익혐의자 수십명은 진상에서 다압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탄치재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이어서 빨치산으로 입산했다고 알려진 이봉옥의 가족들 7~8명은 탄치재와 가까운 고축골에 살고 있었는데, 토벌대는 이들 가족을 집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화형시켰다. 당시 토벌대의 행위는 빨치산 입산자와 주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자행되었다고 여겨진다.
5) 어치리 느재마을
○ 위치: 광양시 진상면 어치리 144-4
1949년 9월 29일 어치리 느재마을 주민 이수경남, 당시 46세, 심옥자여, 당시 7세 심옥자 어머니, 김종석의 아버지 등 마을 주민 9명이 입산자에게 밥을 해주거나 입산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토벌군에게 마을회관 앞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어치리 마을 출신이었던 입산자 황OO이 자수하면서 군경토벌대의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빨치산 협조자를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군경토벌대는 이날 아침 9시 경에 전 주민을 모아놓고 눈을 감게 한 뒤 자수자 황OO이 지목한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 7명을 대검 등으로 살해하였다.
다. 구례군
1) 구례 산동면
○ 위치: 구례군 산동면 입구 주유소 뒤편
구례군 산동면 학살은 여순사건 발발 후 국군 제3연대가 산동면 원촌리에 소재한 원촌국민학교에 지리산 토벌사령부를 설치, 주둔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 원촌국민학교현 원천초등학교에 주둔을 마친 3연대는 1948년 11월부터 산동면의 주민들을 공터나 중동국민학교에 집합시킨 뒤 취조를 하고 입산한 빨치산에게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당시 산동면의 학살지로는 산동면 시상리 산46번지인 꽃쟁이재, 외산리 한천마을의 참새미골, 신학리 오향마을의 왕재, 이평리 윤씨 선산부근의 횟골모퉁이 등으로 수십 명 이상이 학살되었으며, 특히 꽃쟁이의 경우에는 토벌사령부로 잡혀온 빨치산 부대원까지 천 여 명 이상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오빠 대신 붙잡혀 갔다는 백순례의 산동애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곳도 꽃쟁이 학살지이다.
2) 구례봉성산구례경찰서
○ 위치: 구례군 구례읍 봉서리 산5번지 일대
구례읍은 12연대가 주둔하였던 지역으로, 1948년 11월 19일 5시경에 봉기군의 구례경찰서 습격으로 교전이 벌어졌다. 교전 직후 새벽, 군경은 구례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72명의 민간인들을 구례경찰서 옆 공터 등지에서 살해하였는데 이는 경찰서 습격과 무관한 민간인 구금자들에게 혐의를 씌우려는 의도였다.
사건 후 시신은 구례읍 봉서리에 있는 봉성산에 매장되었다. 2007년 6월 진화위에서 암매장지 발굴 결과 11~13구의 시신이 확인되었다. 치아, 뼈조작, 탄환, 단추 등이 발견되었지만, 심한 부식으로 시신의 일부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희생자 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8개의 탄두가 두개골 부근에서 발견되어서 당시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3) 간문천변
○ 위치: 구례군 간전면 간전중앙로 164 간문초등학교
1948년 11월 구례군 간전면에 주둔했던 제12연대연대장 백선엽는 백운산 인근의 좌익을 고립시키기 위해, 11월 20일에서 23일 간전면 금산리와 효곡리 등 산간마을들을 소개시켰다. 소개된 주민들 중 젊은 사람들은 간문국민학교로 끌고 갔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빨치산 협조 여부나 남로당 가입여부 등을 취조하였다. 취조 후 많은 사람들이 집단 학살당했다.
이어서 11월 23일 군용 차량의 이동을 위해 간전면의 동방천 다리공사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군경은 당시 공사에 동원된 사람 중 반군에 협조적인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해 군경에 협조적인 사람들을 골라 지목하게 하고 지목된 수십 명의 젊은 사람들은 간문천변에서 학살당했다.
4) 구례 서시천
○ 위치: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구례읍에서 화엄사로 올라가는 입구인 마산면 황전리에서는 1948년 11월 18일부터 19일 새벽까지 봉기군과 제12연대가 교전했다. 11월 19일 새벽 봉기군이 화엄사 방향으로 도주하자 12연대가 이를 추격했다. 12연대는 화엄사 입구마을인 황전리를 수색하면서 마을 주민 전원을 마을 앞에 있는 논바닥에 꿇려 앉힌 다음 군지휘관이 주민 17명을 지명하여 끌어내고, 서시천변에서 16명을 사살하였다.
이어서 마산리 청내마을 주민들도 마을 앞 논바닥에 집결시킨 뒤 마을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소각하였다. 이로 인해 청내마을은 마을이 사라졌는데 집결된 주민 중 30여명은 서시천변에서 끌려가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라. 보성군
1) 웅치면 강산리
○ 위치: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 보성서초등학교현재 폐교 별관 뒤
여순사건 직후 웅치면에서는 봉기군이 지서를 습격하고 초등학교에 주민들을 소집하여 인민위원회 군중대회를 열고 우익 인사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진압 이후 경찰은 항일운동가 김몽길 등 웅치면 주민들이 좌익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살했다.
지방좌익들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며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을 지낸 김몽길당시 42세, 전 웅치면장에게 1948년 10월 23일 면민대회에서 연설할 것을 강요했고, 그는 면민대회에 나가 “국가와 민족이 단합되어야 한다”는 간략한 인사말을 하고 귀가했다.
군경의 진압 후 그는 면민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11월 30일 보성경찰서로 연행되어 10여 일 조사를 받았으며, 12월 초 강산마을에서 주민들을 마을 앞 정자나무로 불러내 집합시킨 가운데 김몽길의 집을 소각했다. 12월 12일 그는 보성서초등학교 뒤 논에서 주민 8~9명과 함께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2) 웅치면 봉산리 삼수마을
○ 위치: 보성군 웅치면 지서
여순사건 후 삼수마을 뒤 학성산에는 좌익들이 자주 출몰해 삼수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얻어갔다. 11월 말경 웅치지서 경찰들이 마을주민을 소집해 청년들을 지서로 데려가 고문을 하며 좌익에 협조했는지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박성모남, 당시 22세가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1949년 1월 9일 경 사살되었다.
그 후 군경은 학성산에서 다시 내려온 좌익들에게 마을 구장인 박명주남, 당시 35세가 식량을 줬다는 혐의로 7월 2일 보성읍 예동리 반고개에서 7~8명을 사살했다. 그 후 박태욱, 박충식, 박성기, 박충식의 처, 박행식의 처를 웅치지서 앞 솔밭에서 사살하였다.
3) 득량면 정홍리
○ 위치: 보성군 득량면 정홍리 동막마을
여순사건 이후 정홍리 뒷산인 봉화산에서 활동하던 반군이 정홍리 동막마을에 살던 황구추여, 당시 38세의 집에 내려와 밥을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경찰은 1948년 12월 18일 경 득량면 오봉리 7구 덕고개에서 그녀를 사살하였다.
1949년 6월 14일 경 경찰토벌대는 정홍리 뒷산에서 안용순남, 당시 24세 등 약 3명을 봉기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사살하였다. 그의 동생 안형순남, 당시 19세은 1949년 8월경에 경찰에 연행되어 보성읍 원봉리 청용 마을 앞 야산에서 10여 명과 함께 사살된 후 암매장되었다.
4) 득량면 도촌리
○ 위치: 보성군 득량면 도촌리 대화·학동마을
도촌리 대화·학동마을은 청방산 아랫마을로, 여순사건 이후 청방산에 숨어있던 봉기군들이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가져가곤 했다. 지서 경찰은 봉기군을 잡아 취조 중 식량을 제공한 사람들 명단이 적힌 수첩을 입수했고, 학동마을 주민 이만수를 연행해 봉기군에 협조했는지 고문했다. 그는 고문에 못 이겨 청방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봉기군에게 협조했다고 진술했다.
1949년 1월 2일 지서 경찰들은 대화마을 주민 임동철남, 당시 27세 등을 지서로 연행했다. 다음날 경찰은 득량지서 옆 배나무 과수원 앞 도로변에서 임동철 외 7명을 사살했다. 이후에 민간인 살해는 계속되어 1949년 8월경 대화마을 임한열남, 당시 34세이 농사일을 하다 지서로 불려가 연행된 이들 5~6명과 함께 지서 인근 나무 과수원 앞 도로변에서 사살됐다.
5) 득량면 해평리
○ 위치: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송윤섭(남, 당시 27세)은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고향인 완도군 금당면 육산리에 돌아왔는데 일본 유학 후 좌익 활동을 했다. 그는 부친이 운영하던 득량면 해평리 용칠골 벌목장에서 숯 굽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은 산사람들과 내통한다는 협의로 득량지서로 연행했다.
1948년 11월 21일경 그는 지서에 잡힌 사람들과 함께 득량 광장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그의 동생 송치섭남, 당시 19세도 득량면 해평리 산판에서 부친 일을 돕다가 같은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일꾼 10여 명과 함께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마. 고흥군
1) 대서면 남정리
○ 위치: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 양곡창고
대서면에서는 송석룡, 장학래 등 일제강점기부터 좌익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해방 후 청년들을 포섭하면서 활동했다. 좌익들은 여순사건 직후 대서면 금마리 봉두산 등에 입산하여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얻어가거나, 마을 양곡창고를 강탈하기도 했다.
1948년 11월경 정다현남, 당시 25세, 정갑선남, 당시 38세 등 마을청년들은 대서면 남정리 간척지에서 동원되어 탈곡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 10여 명이 왔다. 경찰은 이들을 연행하여 작업자들이 봉기군에 협조했는지 고문했다. 경찰은 11월 11일 지서 담벽에서 이들을 사살하였다.
2) 동강면 마륜리
○ 위치: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여순사건 전부터 동강면 마륜리에는 지방좌익들이 밤에 회의를 열어 주민들을 동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1948년 12월 22일경 경찰이 동강면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수색하여 청년들을 연행했다. 그 중 우익인사 송규섭의 아들 송재원남, 당시 22세도 연행되었는데 대서면 양곡 창고에 그를 가둬놓고 조사하였다. 며칠 후 송재원은 좌익의 회의에 참석했다고 지목되어 다른 7~8명과 함께 12월 27일경 대서면 마륜리 마을 동쪽 들판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3) 남양면 장담마을
○ 위치: 고흥군 남양면 장담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산악지대로 숨어든 봉기군들은 일부 지역에서 전신주를 절단하였다. 당시 고흥 관내는 벌교·고흥읍·녹동면 등 각 지서를 연결하는 목조 전신주가 있었다. 이 전신주를 봉기군이 절단하는 일이 발생해 야간에는 주요 지점마다 각 마을 청년들이 순찰을 돌았다.
1949년 5월 3일경 밤 과역면 도천리 하송 마을과 남양면 노송리 경계 지점에서 전신주 10여 개가 절단된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아침 과역 지서 소속 경찰과 의경들이 장담 마을을 포위하고 마을회관 앞에 주민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가택수색을 한 결과 야간 경비를 섰던 김명수, 송하봉, 이종윤 등을 먼저 연행했고, 면서기 김 아무개를 포함해 모두 12명을 지서로 연행했다. 경찰은 청년들이 전신주 절단에 가담했는지 추궁하며 고문했는데, 이들 중 주범으로 송하봉, 이종윤이 1949년 5월 8일경 각각 장담마을 뒤 공동묘지와 고흥읍 부근 저수지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이어서 유춘재, 김명수, 표춘기, 류정담, 장옥석, 박종수 등 6명이 불려나가 5월 9일경 점암면 운암산 돌고개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이 사건은 2년 후 1951년 과역면 연등리에 살던 박종남이 자수하면서 전모가 밝혀졌다. 박종남은 좌익계 간부급으로 보성에서 조직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과역면 도천리 해변으로 침투해 집결지인 팔영산으로 가던 중 정보망 차단을 위해 전신주를 절단했다고 고백하였다.
4) 두원면 운대리
○ 위치: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마을 유지였던 한상기남, 당시 60세 집안은 논에 물을 대는 문제로 일부 주민들과 갈등이 있었는데, 여순사건이 발생하면서 딸 한모방과 사위 지유석이 사건에 연루되어 한상기 집안은 좌익으로 지목되었다. 1948년 10월 26일경 아침 경찰들이 한상기 집으로 들이닥쳤는데 자부 박준임여, 당시 29세는 고흥경찰서로 연행되어 10월 27일경 경찰서에 연행된 이들과 함께 고흥읍 남계리 오리정 공동묘지에서 사살되었다.
이후 11월 초경 다시 경찰이 좌익 협조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한상기와 부인 김삼덕여, 당시 57세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흥읍 공동묘지에서 살해되었다. 한천행도 12월 13일경 대서면 송림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보성군 쪽으로 도망가던 중 사살되었다.
5)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
○ 위치: 고흥군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
1948년 11월 초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에서는 포두면·두원면 등지에서 고흥경찰서로 연행된 이들이 경찰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1월 초 정홍기, 정홍주가 사망한 후 둘째 정홍국이 들일을 하러 가던 중 경찰 두 명이 와서 그를 구타하며 연행했다. 당일 고흥경찰은 연행된 이들을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는데, 대략 40여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 순천 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
○ 위치: 순천시 중앙로 255(매곡동)
1935년 우석 김종익 선생의 기부로 세워진 순천 최초의 공립학교였던 순천 농림중학교는 1948년 여순사건의 참화를 입었다. 동포의 학살을 거부하며 봉기한 14연대를 토벌하고자 서면 학구를 거쳐 순천에 진입한 토벌군국군 제2, 3, 12, 15연대의 주둔지였다.
진압부대는 이곳에서 연행되어 온 읍민을 고문, 취조한 뒤 학교의 북서쪽현 대학본부 부근의 도랑과 북동쪽 석현천 제방 부근 등에서 처형하였다. 미국 라이프지 기자 칼마이던스가 이곳의 참상을 기록 사진으로 남겼다.
2) 조곡동 둑실마을 안골현 정원넥스빌, 금강메트로빌 근처
○ 위치: 순천시 중앙로 255(매곡동)
진압군경은 읍내 민간인을 순천북국민학교북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였다. 봉기군에게 협조한 민간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주로 외모,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모략, 강요된 자백이었다. 객관적인 조사도 없이 ‘손가락총’으로 분류되고 그 자리에서 총살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면단위 경찰지서에서 의심받는 민간인을 체포하여 폭행이나 물고문, 전기고문을 한 후 즉결처형하거나 순천경찰서로 보냈다. 경찰서에 갇힌 이들은 강제로 동원한 민간트럭에 실려 죽도봉 안골에서 400여명이 총살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경찰 사격장으로 이용되었던 아픈 역사가 되풀이 된 현장이다.
3)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인근
○ 위치: 순천시 수박등1길 이수중학교 운동장(생목동)
생목동은 말라가던 나무를 주민들이 살려냈다는生木 당산나무가 있고, 그 뒷산은 성황당산으로 하늘에 대한 제사를 올렸던 유서깊은 마을이다. 하지만 1948년 여순사건 때 마을의 서쪽 등성이에 있던 공동묘지에서는 억울한 죽음 앞에 울음소리마저 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제주도 출병을 거부하고 봉기한 14연대 군인들에게 동조했다고 하여 진압군경은 장환봉 등 순천철도국 소속 기관사 등 30~40명을 1948년 11월에 이곳에서 총살하고 불태웠다. 민간인에 대해 영장 없는 연행과 구금, 증거도 없이 재판하여 살해하는 불법행위를 한 점이 인정되어 2019년 3월에 대법원으로부터 재심하도록 결정되었다. 한편, 좌익에 협력한 것으로 오인 받은 해룡면 용전마을 주민 일부도 여기에서 희생되었다.
4) 순천 북국민학교현 북초등학교
○ 위치: 순천시 북정2길 20(매곡동)
1939년 4월에 개교한 초등학생 배움터는 1948년 여순사건 때 삶과 죽음이 순식간에 결정이 되는 공포의 공간이 되었다. 제주 동포 학살을 거부하며 봉기한 국군 14연대를 토벌한 다른 국군 부대와 경찰은 10월 23일과 24일 부역혐의자를 찾겠다며 순천 읍민을 이곳에 모이게 하였다.
경찰・우익 학생과 청년・지방 유지를 앞세워 혐의자를 가리키는 순간 총살 내지 처벌 대상자가 되었기에 이를 ‘손가락총’이라 불렀다. 협력자로 분류된 지역민은 학교 부근이나, 가까운 골짜기로 끌려가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최후를 맞았다. 10월 24일에는 순천지검의 박찬길 검사가 인민재판장을 했다고 조작하여, 20명과 함께 교정에서 학살하였다. 북초등학교는 반군 진압 이후에도 한동안 경찰 부대의 주둔지가 되었다.
5) 구랑실재
○ 위치: 순천시 서면 압곡리 용림마을 입구매천로 압곡육교 옆
구랑실은 순천 서면 삼거리에서 구상리와 광양으로 넘어가는 주요한 교통로였다. 변두리를 잇는 정겨운 길은 피학살자의 수송로가 되었고, 포근했던 골짜기와 능선은 학살지와 매장지가 되었다. 1948년 10월 23일과 24일 순천북초에서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순천읍민을 이곳에서 학살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순천과 광양경철서가 소집한 보도연맹원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한 곳이기도 하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어서 시신이 쌓인 골짜기라는 의미로 ‘송장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고속국도 공사가 많이 진행된 시점에 발굴을 하였지만 유해 1구와 신발을 수습하는데 그쳤다.
6) 매곡동 학살지
○ 위치: 학살지 - 순천시 매곡동 매산중학교 옆 / 희생자 무덤 - 순천시 매곡동 경로당
군산에서 파견된 12연대 진압군은 22일 오후 5~6시경 매곡동 매산등 선교부까지 이르렀다. 이들은 매산등 당산나무 아래 동네에서 우선 젊은이나 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을 수색하여 매산중학교 울타리까지 올라가게 했다.
진압군은 30여명의 민간인들을 매산등 당산나무 근처 매산중학교 철조망 울타리 근처로 모이게 한 후 울타리를 넘어 매산중 교정에서 엎드린 상태로 몸수색을 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다시 울타리를 넘게 하였으며, 그 상태로 위쪽으로 10여 미터 올라가서 운동장 쪽을 향해 멈추게 한 후, 등 뒤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살하였다.
이후 학살지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순천 선교부 소유의 밭 구덩이에 묻혔다. 미국인 선교사 보이열 목사는 4명의 일꾼을 동원하여 매장하게 하였다. 집단으로 매장한 곳은 양성호의 부모가 경작하던 밭으로, 원래 그곳은 밭 언덕에 인접하여 물이 고여 있다가 가을이 되면 마르는 영역이었다. 그래서 물이 고이도록 웅덩이를 파놓았던 지점이었다. 30여명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하여 짧은 시간에 땅을 파기가 어려워서 기존에 있었던 웅덩이 주변을 곡괭이로 정비한 다음에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 광양시
1) 반송쟁이(덕례리)
○ 위치: 광양시 광양읍 덕례리 주령길 13-12
여순사건이 일어난 직후 광양경찰서는 경찰병력 1개 중대를 차출해 순천으로 보냈으나, 순천에 진입하기 전에 14연대 봉기군에게 기습당해 경찰 3~4명이 희생되고 광양으로 돌아왔다. 이후 각 지역에서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된 시점인 1948년 10월 말경, 광양지역의 여순사건 부역혐의자 30여명을 색출하여 광양읍 덕례리 반송재에서 집단 사살하였다.
당시 희생자의 현황은 광양지역 출신인 사진작가 이경모의 사진을 통해서 반송쟁이와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 이경모 기자의 친구였던 김영배당시 21세는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대학 상황이 안정되면 상경하려고 고향에서 공부하던 중에 부역혐의자로 몰려 이곳에서 학살되었다.
2) 우산리 쇠머리
○ 위치: 광양시 광양읍 우산리 쇠머리
1949년 9월 16일, 14연대 군인들과 지방좌익으로 구성되어 백운산에 주둔한 빨치산들이 광양읍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발생 직후인 9월 17일 광양경찰서의 경찰은 읍내 주민들을 광양읍사무소 광장 앞에 집합시키고, 이들 중 약 40명을 광양읍 우산리 일명 ‘쇠머리’로 데려가 집단으로 학살했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20여 명씩 사람을 실은 트럭 2대가 도착하고 포승줄에 묶여있던 탑승자를 내리게 하더니 종대로 사람을 세우고 총으로 사살하였다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자에게 증언하였다.
3) 솔티재
○ 위치: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 솔티재
1948년 11월 11일 봉강면 지곡리의 선동 적임자로 거론된 조용래씨를 비롯한 10여명은 광양읍 사곡리 솔티재로 끌려가 집단으로 사살 당했다. 당시 대한청년단원으로 연행과정에서 조용래의 시신을 목격한 정OO씨당시 25세는 부면장이었던 조용래가 전단지 배포를 거부했는데도 경찰에게 연행되었다고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진술했다. 솔티재에서는 1949년 9월 21일에도 경찰토벌대가 옥곡면 묵백리의 변은약, 이강현, 이만수 등 30여명의 민간인들을 끌고와 집단학살하였다.
4) 탄치재와 고축골
○ 위치: 광양시 진상면 탄치재
여순사건 발발 후인 1948년 11월경 광양시 진상면 지역의 좌익혐의자 수십명은 진상에서 다압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탄치재에서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이어서 빨치산으로 입산했다고 알려진 이봉옥의 가족들 7~8명은 탄치재와 가까운 고축골에 살고 있었는데, 토벌대는 이들 가족을 집에 가둔 채 불을 질러 화형시켰다. 당시 토벌대의 행위는 빨치산 입산자와 주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자행되었다고 여겨진다.
5) 어치리 느재마을
○ 위치: 광양시 진상면 어치리 144-4
1949년 9월 29일 어치리 느재마을 주민 이수경남, 당시 46세, 심옥자여, 당시 7세 심옥자 어머니, 김종석의 아버지 등 마을 주민 9명이 입산자에게 밥을 해주거나 입산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토벌군에게 마을회관 앞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어치리 마을 출신이었던 입산자 황OO이 자수하면서 군경토벌대의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빨치산 협조자를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군경토벌대는 이날 아침 9시 경에 전 주민을 모아놓고 눈을 감게 한 뒤 자수자 황OO이 지목한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 7명을 대검 등으로 살해하였다.
다. 구례군
1) 구례 산동면
○ 위치: 구례군 산동면 입구 주유소 뒤편
구례군 산동면 학살은 여순사건 발발 후 국군 제3연대가 산동면 원촌리에 소재한 원촌국민학교에 지리산 토벌사령부를 설치, 주둔하면서 발생하게 되었다. 원촌국민학교현 원천초등학교에 주둔을 마친 3연대는 1948년 11월부터 산동면의 주민들을 공터나 중동국민학교에 집합시킨 뒤 취조를 하고 입산한 빨치산에게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당시 산동면의 학살지로는 산동면 시상리 산46번지인 꽃쟁이재, 외산리 한천마을의 참새미골, 신학리 오향마을의 왕재, 이평리 윤씨 선산부근의 횟골모퉁이 등으로 수십 명 이상이 학살되었으며, 특히 꽃쟁이의 경우에는 토벌사령부로 잡혀온 빨치산 부대원까지 천 여 명 이상이 학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오빠 대신 붙잡혀 갔다는 백순례의 산동애가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오는 곳도 꽃쟁이 학살지이다.
2) 구례봉성산구례경찰서
○ 위치: 구례군 구례읍 봉서리 산5번지 일대
구례읍은 12연대가 주둔하였던 지역으로, 1948년 11월 19일 5시경에 봉기군의 구례경찰서 습격으로 교전이 벌어졌다. 교전 직후 새벽, 군경은 구례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72명의 민간인들을 구례경찰서 옆 공터 등지에서 살해하였는데 이는 경찰서 습격과 무관한 민간인 구금자들에게 혐의를 씌우려는 의도였다.
사건 후 시신은 구례읍 봉서리에 있는 봉성산에 매장되었다. 2007년 6월 진화위에서 암매장지 발굴 결과 11~13구의 시신이 확인되었다. 치아, 뼈조작, 탄환, 단추 등이 발견되었지만, 심한 부식으로 시신의 일부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희생자 수를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8개의 탄두가 두개골 부근에서 발견되어서 당시의 참상을 짐작할 수 있다.
3) 간문천변
○ 위치: 구례군 간전면 간전중앙로 164 간문초등학교
1948년 11월 구례군 간전면에 주둔했던 제12연대연대장 백선엽는 백운산 인근의 좌익을 고립시키기 위해, 11월 20일에서 23일 간전면 금산리와 효곡리 등 산간마을들을 소개시켰다. 소개된 주민들 중 젊은 사람들은 간문국민학교로 끌고 갔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빨치산 협조 여부나 남로당 가입여부 등을 취조하였다. 취조 후 많은 사람들이 집단 학살당했다.
이어서 11월 23일 군용 차량의 이동을 위해 간전면의 동방천 다리공사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었다. 군경은 당시 공사에 동원된 사람 중 반군에 협조적인 사람들을 색출하기 위해 군경에 협조적인 사람들을 골라 지목하게 하고 지목된 수십 명의 젊은 사람들은 간문천변에서 학살당했다.
4) 구례 서시천
○ 위치: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구례읍에서 화엄사로 올라가는 입구인 마산면 황전리에서는 1948년 11월 18일부터 19일 새벽까지 봉기군과 제12연대가 교전했다. 11월 19일 새벽 봉기군이 화엄사 방향으로 도주하자 12연대가 이를 추격했다. 12연대는 화엄사 입구마을인 황전리를 수색하면서 마을 주민 전원을 마을 앞에 있는 논바닥에 꿇려 앉힌 다음 군지휘관이 주민 17명을 지명하여 끌어내고, 서시천변에서 16명을 사살하였다.
이어서 마산리 청내마을 주민들도 마을 앞 논바닥에 집결시킨 뒤 마을에 불을 질러 마을 전체를 소각하였다. 이로 인해 청내마을은 마을이 사라졌는데 집결된 주민 중 30여명은 서시천변에서 끌려가 집단으로 학살당했다.
라. 보성군
1) 웅치면 강산리
○ 위치: 보성군 웅치면 강산리 보성서초등학교현재 폐교 별관 뒤
여순사건 직후 웅치면에서는 봉기군이 지서를 습격하고 초등학교에 주민들을 소집하여 인민위원회 군중대회를 열고 우익 인사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진압 이후 경찰은 항일운동가 김몽길 등 웅치면 주민들이 좌익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사살했다.
지방좌익들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며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을 지낸 김몽길당시 42세, 전 웅치면장에게 1948년 10월 23일 면민대회에서 연설할 것을 강요했고, 그는 면민대회에 나가 “국가와 민족이 단합되어야 한다”는 간략한 인사말을 하고 귀가했다.
군경의 진압 후 그는 면민대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11월 30일 보성경찰서로 연행되어 10여 일 조사를 받았으며, 12월 초 강산마을에서 주민들을 마을 앞 정자나무로 불러내 집합시킨 가운데 김몽길의 집을 소각했다. 12월 12일 그는 보성서초등학교 뒤 논에서 주민 8~9명과 함께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였다.
2) 웅치면 봉산리 삼수마을
○ 위치: 보성군 웅치면 지서
여순사건 후 삼수마을 뒤 학성산에는 좌익들이 자주 출몰해 삼수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얻어갔다. 11월 말경 웅치지서 경찰들이 마을주민을 소집해 청년들을 지서로 데려가 고문을 하며 좌익에 협조했는지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박성모남, 당시 22세가 좌익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1949년 1월 9일 경 사살되었다.
그 후 군경은 학성산에서 다시 내려온 좌익들에게 마을 구장인 박명주남, 당시 35세가 식량을 줬다는 혐의로 7월 2일 보성읍 예동리 반고개에서 7~8명을 사살했다. 그 후 박태욱, 박충식, 박성기, 박충식의 처, 박행식의 처를 웅치지서 앞 솔밭에서 사살하였다.
3) 득량면 정홍리
○ 위치: 보성군 득량면 정홍리 동막마을
여순사건 이후 정홍리 뒷산인 봉화산에서 활동하던 반군이 정홍리 동막마을에 살던 황구추여, 당시 38세의 집에 내려와 밥을 해달라고 요구했는데, 경찰은 1948년 12월 18일 경 득량면 오봉리 7구 덕고개에서 그녀를 사살하였다.
1949년 6월 14일 경 경찰토벌대는 정홍리 뒷산에서 안용순남, 당시 24세 등 약 3명을 봉기군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사살하였다. 그의 동생 안형순남, 당시 19세은 1949년 8월경에 경찰에 연행되어 보성읍 원봉리 청용 마을 앞 야산에서 10여 명과 함께 사살된 후 암매장되었다.
4) 득량면 도촌리
○ 위치: 보성군 득량면 도촌리 대화·학동마을
도촌리 대화·학동마을은 청방산 아랫마을로, 여순사건 이후 청방산에 숨어있던 봉기군들이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가져가곤 했다. 지서 경찰은 봉기군을 잡아 취조 중 식량을 제공한 사람들 명단이 적힌 수첩을 입수했고, 학동마을 주민 이만수를 연행해 봉기군에 협조했는지 고문했다. 그는 고문에 못 이겨 청방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봉기군에게 협조했다고 진술했다.
1949년 1월 2일 지서 경찰들은 대화마을 주민 임동철남, 당시 27세 등을 지서로 연행했다. 다음날 경찰은 득량지서 옆 배나무 과수원 앞 도로변에서 임동철 외 7명을 사살했다. 이후에 민간인 살해는 계속되어 1949년 8월경 대화마을 임한열남, 당시 34세이 농사일을 하다 지서로 불려가 연행된 이들 5~6명과 함께 지서 인근 나무 과수원 앞 도로변에서 사살됐다.
5) 득량면 해평리
○ 위치: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송윤섭(남, 당시 27세)은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고향인 완도군 금당면 육산리에 돌아왔는데 일본 유학 후 좌익 활동을 했다. 그는 부친이 운영하던 득량면 해평리 용칠골 벌목장에서 숯 굽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은 산사람들과 내통한다는 협의로 득량지서로 연행했다.
1948년 11월 21일경 그는 지서에 잡힌 사람들과 함께 득량 광장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그의 동생 송치섭남, 당시 19세도 득량면 해평리 산판에서 부친 일을 돕다가 같은 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일꾼 10여 명과 함께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마. 고흥군
1) 대서면 남정리
○ 위치: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 양곡창고
대서면에서는 송석룡, 장학래 등 일제강점기부터 좌익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해방 후 청년들을 포섭하면서 활동했다. 좌익들은 여순사건 직후 대서면 금마리 봉두산 등에 입산하여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얻어가거나, 마을 양곡창고를 강탈하기도 했다.
1948년 11월경 정다현남, 당시 25세, 정갑선남, 당시 38세 등 마을청년들은 대서면 남정리 간척지에서 동원되어 탈곡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 10여 명이 왔다. 경찰은 이들을 연행하여 작업자들이 봉기군에 협조했는지 고문했다. 경찰은 11월 11일 지서 담벽에서 이들을 사살하였다.
2) 동강면 마륜리
○ 위치: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여순사건 전부터 동강면 마륜리에는 지방좌익들이 밤에 회의를 열어 주민들을 동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1948년 12월 22일경 경찰이 동강면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수색하여 청년들을 연행했다. 그 중 우익인사 송규섭의 아들 송재원남, 당시 22세도 연행되었는데 대서면 양곡 창고에 그를 가둬놓고 조사하였다. 며칠 후 송재원은 좌익의 회의에 참석했다고 지목되어 다른 7~8명과 함께 12월 27일경 대서면 마륜리 마을 동쪽 들판에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3) 남양면 장담마을
○ 위치: 고흥군 남양면 장담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산악지대로 숨어든 봉기군들은 일부 지역에서 전신주를 절단하였다. 당시 고흥 관내는 벌교·고흥읍·녹동면 등 각 지서를 연결하는 목조 전신주가 있었다. 이 전신주를 봉기군이 절단하는 일이 발생해 야간에는 주요 지점마다 각 마을 청년들이 순찰을 돌았다.
1949년 5월 3일경 밤 과역면 도천리 하송 마을과 남양면 노송리 경계 지점에서 전신주 10여 개가 절단된 사건이 발생했다. 다음날 아침 과역 지서 소속 경찰과 의경들이 장담 마을을 포위하고 마을회관 앞에 주민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가택수색을 한 결과 야간 경비를 섰던 김명수, 송하봉, 이종윤 등을 먼저 연행했고, 면서기 김 아무개를 포함해 모두 12명을 지서로 연행했다. 경찰은 청년들이 전신주 절단에 가담했는지 추궁하며 고문했는데, 이들 중 주범으로 송하봉, 이종윤이 1949년 5월 8일경 각각 장담마을 뒤 공동묘지와 고흥읍 부근 저수지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이어서 유춘재, 김명수, 표춘기, 류정담, 장옥석, 박종수 등 6명이 불려나가 5월 9일경 점암면 운암산 돌고개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이 사건은 2년 후 1951년 과역면 연등리에 살던 박종남이 자수하면서 전모가 밝혀졌다. 박종남은 좌익계 간부급으로 보성에서 조직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과역면 도천리 해변으로 침투해 집결지인 팔영산으로 가던 중 정보망 차단을 위해 전신주를 절단했다고 고백하였다.
4) 두원면 운대리
○ 위치: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마을 유지였던 한상기남, 당시 60세 집안은 논에 물을 대는 문제로 일부 주민들과 갈등이 있었는데, 여순사건이 발생하면서 딸 한모방과 사위 지유석이 사건에 연루되어 한상기 집안은 좌익으로 지목되었다. 1948년 10월 26일경 아침 경찰들이 한상기 집으로 들이닥쳤는데 자부 박준임여, 당시 29세는 고흥경찰서로 연행되어 10월 27일경 경찰서에 연행된 이들과 함께 고흥읍 남계리 오리정 공동묘지에서 사살되었다.
이후 11월 초경 다시 경찰이 좌익 협조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한상기와 부인 김삼덕여, 당시 57세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흥읍 공동묘지에서 살해되었다. 한천행도 12월 13일경 대서면 송림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보성군 쪽으로 도망가던 중 사살되었다.
5)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
○ 위치: 고흥군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
1948년 11월 초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에서는 포두면·두원면 등지에서 고흥경찰서로 연행된 이들이 경찰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11월 초 정홍기, 정홍주가 사망한 후 둘째 정홍국이 들일을 하러 가던 중 경찰 두 명이 와서 그를 구타하며 연행했다. 당일 고흥경찰은 연행된 이들을 고흥읍 오리정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는데, 대략 40여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