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좌수영 본영, 여수
여수가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479(성종10년)에 순천(順天) 내례포의 수군만호영(萬戶塋)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해남의 수영을 전라우도수영, 순천(지금의 여수)의 신설수영을 전라좌수영이라 하면서부터 이다.
1593년부터 1601년까지는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본영(本營)이기도 했던 전라좌수영 여수는 조선시대(朝鮮時代) 4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구국의 성지로 전승의 사명(使命)을 다 한 곳이며 지금까지 성웅 이순신 장군의 기백과 충정(衷情)의 정신이 도도히 살아 숨쉬는 역사(歷史)의 고장이다.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의 규모
전라좌수영이 성종(成宗) 16년 최초로 설치될 당시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成宗) 21년 10월에 전라좌수영성을 수축하였는데 당시의 규모를 「주3천6백3십4척(周三千六百三十四尺)」이라 했다. 또 1847년 기록인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서는 성체(城體)주위가 3,158포척(布尺)이라 했다.
조선후기의 전라좌수영 규모
구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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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첩(城堞) | 체성(體性) 주위가 포척(布尺)으로 3,158척 |
여첩(女堞) | 437좌(坐) |
총혈(銃穴) | 1,324처(處) |
곡성(曲城) | 6처(坐) 각처에 포루(鋪樓)와 화포기(花砲器) 6좌 설치(坐) |
민호(民戶) | 성내(城內) 2,024호(戶) |
천정(泉井) | 성중(城中) 7고(庫), 성외(城外) 2고(庫) |
연못 | 덕지(德池) 1처(處) |
조선후기의 전라좌수영 건축 상황
건물명 | 칸수 | 건물명 | 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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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관(鎭南館) | 70 | 중문(中門) | 3 |
운주헌(運籌軒) | 4 | 정변문(靜邊門) | 3 |
백화당(百和堂) | 8 | 완경루(緩輕樓) | 6 |
마구(馬廐) | 14 | 동문(東門) | 9 |
공사문(公事門) | 3 | 동문루(東門樓) | 6 |
동문우포루(東門右鋪樓) | 3 | 남문좌포루(南門左鋪樓) | 2 |
서문우포루(西門右鋪樓) | 2 | 수성중군청(守城中軍廳) | 4 |
망해루(望海褸) | 6 | 결승당(決勝堂) | 4 |
공사문(公事門) | 2 | 무권제(無倦齊) | 3 |
서학당(西學堂) | 6 | 공수(供需) | 5 |
망미루(望美褸) | 4 | 중영동헌(中塋東軒) | 3 |
동문좌포루(東門左鋪樓) | 5 | 서문루(西門樓) | 6 |
남문우포루(南門右鋪樓) | 4 | 서문좌포루(西門左鋪樓) | 2 |
수첩군관청(守堞軍官廳) | 13 | 의승청(義僧廳) | 11 |
전라좌수영 연혁
전라좌수영은 조선 성종 10년(1479)에 최초 설치되어 고종 32년(1895)에 혁파(革罷)될 때까지 400여년간 조선수군의 주진(主鎭)으로서 남해안 방어를 위한 전략적 요충의 수군영(水軍營)이었다. 특히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충무공이 거둔 해전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한 국난극복의 본거지로서 조선수군의 최고사령부였으며, 이후 지역의 정치와 행정의 중추가 되었다.
설영(設營)될 당시의 수군영(水軍營)의 대체적인 면모야 갖추었겠지만, 임란을 거치면서 제반시설은 크게 변모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난중일기」에 축성에 관한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것과 같이 1591년에 충무공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부임하면서 한층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헌종 13년(1847)의 허섬의 「호좌수영지에는 전라좌수영의 영성(塋城)과 병력, 군미, 병기 등이 상당한 규모로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후기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수군영으로서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 32년(1895)에 영(瀯)이 혁파되면서 방치되다가 일제치하로 오면서 영성과 관아건물은 훼천, 또는 방치되기에 이른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몇 년 앞 둔 시점에서 영(營)이 혁파되고, 1916년의 해면매축(海面埋築)과 민가 조성은 영성(營城)의 인멸을 더욱 가속화시키면서 전라좌수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년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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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9년 3월 | 내례포(內禮逋)를 철폐하여 수군절도영(水軍節度營)을 설치하고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둠 |
1485년 3월 | 옥(屋) 대신에 성보(城堡) 축조를 시작 |
1491년 | 성보(城堡) 완성 |
1498년 | 절도사(節度使) 이양(李良)이 돌을 운반, 장군도(將軍島) 왼쪽에 축대를 쌓음 |
1591년 2월 | 이충무공(李忠武公)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으로 부임 |
1592년 1월 | 성문해자(城門垓字) 축조 |
1592년 3월 | 서문(西門) 밖 해자(垓字)와 성곽 축조 |
1592년4월 | 품방해자(品防垓字) 축조, 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 |
1593년 7월 |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충무공(李忠武公)이 거제(巨濟) 한산도(閑山島)에 진(陣)을 설치 |
1598년 | 절도사(節度使) 이시언(李時言)이 충청병마절도사(忠淸兵馬節度使)에서 본직(本職)으로 옮겨 삼도(三道)를 통제(統制)할 제영사(諸營舍)를 건설 |
1599년 | 이시언이 정유재난(丁酉再亂)으로 소실된 진해루지(鎭海褸地)에 객사(客舍) 진남관(鎭南館)을 건립 |
1664년 | 절도사 이도빈(李道彬)이 진남관, 망해루, 결승당(決勝堂)을 재건하고 화약고(火藥庫), 수군기(水軍器), 호고(戶庫), 해현창(解懸倉)을 새로 건립 |
1673년 | 절도사 원상(元相)이 보군창(補軍倉)을 신건 |
1684년 | 절도사 한근(韓根)이 완경루(緩輕樓)를 창건 |
1694년 | 절도사 정동망(鄭東望)이 지창(紙倉)을 창건 |
1716년 | 진남관(鎭南館) 화재로 소실 |
1718년 | 절도사 이제면(李濟冕)이 진남관 중건 |
1722년 | 절도사 박세정(朴世挺)이 도부창을 창건 |
1741년 | 전반집물고(全般什物庫), 병반집물고(兵般什物庫), 외창(外倉)을 창건 |
1759년 | 절도사 이윤덕(李潤德)이 보군창(補軍倉)의 병기고(兵器庫)를 중수 광양둔창(光陽屯倉), 보선고(補線庫)를 중수 |
1773년 | 절도사 김영수(金永綏)가 체성(體城)을 보축(補築)하고, 여첩(女堞)을 개축하였으며 곡성(曲城) 6곳에 포루(鋪樓)를 세우고 화기포(火器砲) 6좌를 설치, 유군기(留軍器), 점궁방(點弓房)을 창건 |
1774년 | 동문루(東門樓)를 철문(鐵門)으로 건립, 장대(將臺)를 겸하는 동문좌포루(東門左鋪樓)를 건립, 서문루(西門樓), 남문좌포루(南門左鋪樓), 서문좌포루(西門左鋪樓), 서문우포루(西門右鋪樓), 수성중군청(守城中軍廳), 의승청(義僧廳), 수첩군관청(守堞軍官廳), 수성고(守城庫)를 창건 |
1895년 |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철폐 |
관할구역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어 폐영(廢營)될 때까지 그 관할해역의 변천을 살펴보면, 「전라좌수영 설치 당시」와 「임진왜란 당시」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의 세단계로 나누어진다.
전라좌수영 설치 당시의 전라좌수사가 지키는 바다 구역은 해남반도 동편에서부터 그 동쪽의 전남해안이었다. 전라좌수사가 거느리는 진포(鎭浦)는 달량(達梁) · 마도(馬島) · 회녕포(會寧浦) · 녹도(鹿島) · 발포(鉢浦) · 사도(蛇渡) · 여도(呂島) · 돌산(突山) 등 8진포이었다 함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임진왜란 당시에 와서는 바다지키는 관할해역(海域)이 해남반도 동편에서, 보성군의 동쪽 전남해안지방으로 축소되어 현 해남군의 일부와 강진군 및 장흥군의 해역(海域)이 전라좌수영의 관할에서 이탈되었다. 따라서 전라좌수영 아래 그 속읍(屬邑)으로 수군이 편성되어 있는 순천부(順天府) · 낙안군(樂安郡) · 보성군(寶城郡) · 광양현(光陽縣) · 흥양현(興陽縣) 등 다섯고을(5 官)과 본시부터 해안방위의 소임을 맡고 있는 속진(屬鎭)인 방답진(防踏鎭) · 사도진(蛇渡鎭) · 여도진(呂島鎭) · 발포진(鉢浦鎭) · 녹도진(鹿島鎭) 등 다섯 진포(鎭浦)(5 浦)가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장흥(長興)해안이 전라좌수영 아래로 들어와 전라좌수영에 속하는 고을은 앞서 밝힌 다섯고을 5관(五官)에 장흥부(長興府)가 추가되어 6관(六官)이 되고 전라좌수영에 속한 진포(鎭浦)는 앞서 말한 다섯 진포 5포(五浦)에 회녕포진(會寧浦鎭)과 고돌산진(古突山鎭)이 더하여져 7포(七浦)가 되어 소위 「6관 · 7포」가 되었다. 이는 고종 32년(1895) 전라좌수영이 폐영 될 때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