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MBC 창사 31주년 특집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 > #2 산동애가
- 날짜
- 2021.10.13 13:25
- 조회수
- 303
- 등록자
- 윤성현
여수MBC 창사 31주년특집 다큐멘터리 - 아직도 못 다 부른 노래 / 산동애가
섬진강과 지리산의 품안에 터를 잡은 전남 구례군 이 지역 역시 한국전쟁때보다 여순사건으로 더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전남구례군 산동면 상관마을) 산수열매를 따다 가난한 살림을 보태던 이곳 산동면은 일면 과부촌이라는 슬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깊은 상처가 베어나는 곳이다
이곳 산골사람들의 가슴에는 피맺힌 한을 다독여 온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 한곡이 전해지고 있다
홍순례(62) 구례군 산동면 - 시집와서 들으니까, 아가씨(백순례)가 모략에 의해서 죽었는데, 이쁘고 똑똑해서 (군인들이)죽이기가 아깝다고 했다더라.
끌려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잡혀갈때 노래가 나왔을 거시 죽은 무덤에 가서 노래가 나왔다고 참새 밑에서 죽었거든
갈길마다 눈물지며 꽃으로 떨어져서 노고단골짜기서 이름없이 쓰러졌네
아픔한둘 없는 생이 어디있을까 여순사건으로 오빠를 잃었다는 홍순례씨도 끝내 노래를 맺지 못했다
세월의 아픔이 묻어나는 눈물을 뒤로하고 산동애가를 지었다는 백순례의 생가를 찾았다
백정규(51) 백순례의 조카 - 그때당시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형님 바로위에 형님 두 큰아버지하고 같이 아버지, 고모님하고 같이 끌려가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고모님이 그래도 이집안의 대를 이어가지고 아들은 하나 있어야 할것아니냐 차라리 우리 죽이고 나까지는 죽어도 좋으니까 막내 오빠만은 하나 살려다오 애원해가지고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 여기 살게 되었습니다.
천석군 살림을 자랑하던 부귀영화는 꿈인듯 자취를 감추고 옛터를 지키며 근근히 살림을 이어오던 조카며느리가 낡은 사진 한장을 꺼내주었다.
박오목(43) 백순례의 조카며느리 - 이게 저희 시할머니시고요 이분이 제일 막둥이 고모인데 산동애가를 부르신 고모님이세요. 그리고 이게 큰따님이시고..
빛바랜 사진속에는 이제는 만날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진영으로 끌려가 소식이 끊겨버린 큰오빠(큰오빠 백남수 일제때 징용후 사망)와의 마지막 기념사진 한장,
경찰의 모진 고문끝에 총살당한 둘째오빠 백남승(당시 23세 사건당시 진입군에 의해 처형당함),
전쟁이 일어나자 북녘땅에 발길이 묶여버린 언니 백순남(6.25때 행방불명),
자신을 대신해 죽은 여동생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에 살다간 막내오빠 백남극(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림)
그리고 본명이 백순례(당시 19세, 막내오빠를 대신해 처형당함)로 알려진 천석꾼 집안의 곱디고운 막내딸 부전
이들의 얼굴 하나하나에는 일그러진 우리 현대사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슬픈 처지를 노래하며 죽어간 딸을 가슴에 묻은채 모진 생을 이어가야 했던 어머니(어머니 고선옥 1987년 사망)는 질긴 이 생의 끈을 놓는 순간까지 막내딸 부전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고 한다.
증손녀 영미가 있었는데, 돌아가실 무렵 치매에 걸리셨을때 증손녀를 막내딸 부전으로 착각하고 '부전아, 부전아'하고 부르시곤 하셨어요
할머니 막내딸 그때 반란사건때 돌아가신 고모님 이름을 부르시더라고요
(반군들 지리산 입산기사)백부전 일가의 비극은 당시 이곳 구례군 일대 어디서나 볼수있었던 참상이였다 큰 산아래 살고있다는 이유만으로 낮과 밤이 다른 해방구가 되어 유래없는 사육의 아픔을 견뎌야 했던 구례.. 그러나 이들 중 어느누구도 소리내어 아픔을 얘기하지 못했다 내 아버지, 내 혈육을 잃은 슬픔보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이 무서워 반세기를 아프게 침묵해온 사람들 고통은 그만큼 참혹했던 것이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로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박창근씨((67)여순사건 당시 아버지가 끌려가 총살됨)
조사나온 사람들을 따라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 무심한 세월의 풍생에도 생생한 아픔으로 되살아 난다.
(간전면 희생자명단)
늦었지만 이제라도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그가 발벗고 나섰다 여순사건 당시 양민 학살 역시 제주도와 거창의 경우처럼 특별법으로 처리해줄 것을 정부와 국회에 청원했지만(국회에 낸 청원서) 아무런 진전도 보지못한 상황
청상의 나이로 홀로되신 늙은 어머니 귀밑머리 펴주며 평생을 기약하던 남편을 비명에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멍든가슴에는 아직도 삭혀내지 못한 아픔이 그대로 묻어난다.
어머니 조성순(84)사건당시 30세 - 나 서른살 먹어서 그랬어 그사람 서른한살 먹고.. 팔십너이라 내가 억울하기만해 그놈들 다 뒤졌을꺼여 쌩사람들 다 죽였으니까 다뒤져
여순사건을 일으킨 주력부대의 마지막 거점지였던 구례지역에서는 빨치산이 완전 진압될때까지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부역자 색출이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18일 단 하루동안에 구례 경찰서에서 총살된 민간인 수만 해도 일흔두명 시체는 다음날 봉성산 기슭에 뭍혔다
구례군 희생자 수 산동면 450명, 용방면 미파악, 광의면 13~14명, 구례읍구례경찰서 72명, 마산명 16명, 토지면 12명, 문척면 19명, 간천면 96명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숨죽여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유족과 마을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구례군 전 지역에서 희생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미리 리스트를 작성해 놓은 진압군에 끌려가 부인하면 맞아주고 시인하면 총살당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그 모진 겨울을 보내야 했다
(구례 봉성산 공동묘지 72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묻힘) 산으로 들어간 유격대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토벌대와의 싸움에 무고한 민초들의 처절한 삶이 있었던 것이다
문승이(78)전 구례문화원장 - 근방 문지방위에다가 태극기하고 인공기하고 같이놓고 살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사람들이 와서 국기 내놓으시오 이럴때에 상대방이 어느편인가 누구인가를 감으로 판명해가지고 이제 국군이라고 생각이 들면 태극기, 산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들면 인공기를 내야 되는데...
낮과밤을 다르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산 아래 사람들 (구례읍)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온 노래가 바로 산동애가 였다 열아홉 처녀가 경찰에 끌려가며 불렀다는 이 노래는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지리산 아래 사람들의 상처를 말없이 다독여 왔다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없이 쓰러져간 원혼의 넋은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로 기억되고있다
최종대(62) 전 구례번영회장, 한의사 - 제 어렸들때도 모임을 가지고 이렇게 하게되면 반드시 산동애가 주인공 이야기가 나와가지고 그렇게 열아홉살에 나이도 열아홉살에 결혼도 못하고 노래 나오듯이 꽃봉오리가 피기전에 죽어갔다는 그 내용으로 해서 노래를 많이 불렀었습니다.
산동애가 작사,작곡 : 백순례(백부전) / 노래 문희원 -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스러졌-네
살기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있거라 산동아 한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못하고 갈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홍영기 교수 순천대 사학과 - 산동애가의 노랫말이든가 곡조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에는 지리산을 무대로 해서 좌우의 대비를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때 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구례지역의 주민들은 토벌군이라든가 빨치산들에 의해서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관계때문에 당시의 주민들의 경우에는 이중의 고통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런 점들이 형제들의 죽음이라든가 빨치산에 끌려가는 것이라든가 진압군에 의한 무고한 죽음이라든가 이런것들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 산동애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섬진강과 지리산의 품안에 터를 잡은 전남 구례군 이 지역 역시 한국전쟁때보다 여순사건으로 더 많은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전남구례군 산동면 상관마을) 산수열매를 따다 가난한 살림을 보태던 이곳 산동면은 일면 과부촌이라는 슬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깊은 상처가 베어나는 곳이다
이곳 산골사람들의 가슴에는 피맺힌 한을 다독여 온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 한곡이 전해지고 있다
홍순례(62) 구례군 산동면 - 시집와서 들으니까, 아가씨(백순례)가 모략에 의해서 죽었는데, 이쁘고 똑똑해서 (군인들이)죽이기가 아깝다고 했다더라.
끌려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잡혀갈때 노래가 나왔을 거시 죽은 무덤에 가서 노래가 나왔다고 참새 밑에서 죽었거든
갈길마다 눈물지며 꽃으로 떨어져서 노고단골짜기서 이름없이 쓰러졌네
아픔한둘 없는 생이 어디있을까 여순사건으로 오빠를 잃었다는 홍순례씨도 끝내 노래를 맺지 못했다
세월의 아픔이 묻어나는 눈물을 뒤로하고 산동애가를 지었다는 백순례의 생가를 찾았다
백정규(51) 백순례의 조카 - 그때당시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형님 바로위에 형님 두 큰아버지하고 같이 아버지, 고모님하고 같이 끌려가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고모님이 그래도 이집안의 대를 이어가지고 아들은 하나 있어야 할것아니냐 차라리 우리 죽이고 나까지는 죽어도 좋으니까 막내 오빠만은 하나 살려다오 애원해가지고 사실은 우리가 오늘날 여기 살게 되었습니다.
천석군 살림을 자랑하던 부귀영화는 꿈인듯 자취를 감추고 옛터를 지키며 근근히 살림을 이어오던 조카며느리가 낡은 사진 한장을 꺼내주었다.
박오목(43) 백순례의 조카며느리 - 이게 저희 시할머니시고요 이분이 제일 막둥이 고모인데 산동애가를 부르신 고모님이세요. 그리고 이게 큰따님이시고..
빛바랜 사진속에는 이제는 만날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진영으로 끌려가 소식이 끊겨버린 큰오빠(큰오빠 백남수 일제때 징용후 사망)와의 마지막 기념사진 한장,
경찰의 모진 고문끝에 총살당한 둘째오빠 백남승(당시 23세 사건당시 진입군에 의해 처형당함),
전쟁이 일어나자 북녘땅에 발길이 묶여버린 언니 백순남(6.25때 행방불명),
자신을 대신해 죽은 여동생 때문에 평생을 죄책감에 살다간 막내오빠 백남극(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림)
그리고 본명이 백순례(당시 19세, 막내오빠를 대신해 처형당함)로 알려진 천석꾼 집안의 곱디고운 막내딸 부전
이들의 얼굴 하나하나에는 일그러진 우리 현대사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자신의 슬픈 처지를 노래하며 죽어간 딸을 가슴에 묻은채 모진 생을 이어가야 했던 어머니(어머니 고선옥 1987년 사망)는 질긴 이 생의 끈을 놓는 순간까지 막내딸 부전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고 한다.
증손녀 영미가 있었는데, 돌아가실 무렵 치매에 걸리셨을때 증손녀를 막내딸 부전으로 착각하고 '부전아, 부전아'하고 부르시곤 하셨어요
할머니 막내딸 그때 반란사건때 돌아가신 고모님 이름을 부르시더라고요
(반군들 지리산 입산기사)백부전 일가의 비극은 당시 이곳 구례군 일대 어디서나 볼수있었던 참상이였다 큰 산아래 살고있다는 이유만으로 낮과 밤이 다른 해방구가 되어 유래없는 사육의 아픔을 견뎌야 했던 구례.. 그러나 이들 중 어느누구도 소리내어 아픔을 얘기하지 못했다 내 아버지, 내 혈육을 잃은 슬픔보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이 무서워 반세기를 아프게 침묵해온 사람들 고통은 그만큼 참혹했던 것이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로 아버지를 잃어야 했던 박창근씨((67)여순사건 당시 아버지가 끌려가 총살됨)
조사나온 사람들을 따라 집을 나서던 아버지의 마지막 뒷모습 무심한 세월의 풍생에도 생생한 아픔으로 되살아 난다.
(간전면 희생자명단)
늦었지만 이제라도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그가 발벗고 나섰다 여순사건 당시 양민 학살 역시 제주도와 거창의 경우처럼 특별법으로 처리해줄 것을 정부와 국회에 청원했지만(국회에 낸 청원서) 아무런 진전도 보지못한 상황
청상의 나이로 홀로되신 늙은 어머니 귀밑머리 펴주며 평생을 기약하던 남편을 비명에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멍든가슴에는 아직도 삭혀내지 못한 아픔이 그대로 묻어난다.
어머니 조성순(84)사건당시 30세 - 나 서른살 먹어서 그랬어 그사람 서른한살 먹고.. 팔십너이라 내가 억울하기만해 그놈들 다 뒤졌을꺼여 쌩사람들 다 죽였으니까 다뒤져
여순사건을 일으킨 주력부대의 마지막 거점지였던 구례지역에서는 빨치산이 완전 진압될때까지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부역자 색출이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18일 단 하루동안에 구례 경찰서에서 총살된 민간인 수만 해도 일흔두명 시체는 다음날 봉성산 기슭에 뭍혔다
구례군 희생자 수 산동면 450명, 용방면 미파악, 광의면 13~14명, 구례읍구례경찰서 72명, 마산명 16명, 토지면 12명, 문척면 19명, 간천면 96명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숨죽여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유족과 마을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구례군 전 지역에서 희생자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미리 리스트를 작성해 놓은 진압군에 끌려가 부인하면 맞아주고 시인하면 총살당하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그 모진 겨울을 보내야 했다
(구례 봉성산 공동묘지 72구의 시체가 한꺼번에 묻힘) 산으로 들어간 유격대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한 토벌대와의 싸움에 무고한 민초들의 처절한 삶이 있었던 것이다
문승이(78)전 구례문화원장 - 근방 문지방위에다가 태극기하고 인공기하고 같이놓고 살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사람들이 와서 국기 내놓으시오 이럴때에 상대방이 어느편인가 누구인가를 감으로 판명해가지고 이제 국군이라고 생각이 들면 태극기, 산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들면 인공기를 내야 되는데...
낮과밤을 다르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산 아래 사람들 (구례읍)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온 노래가 바로 산동애가 였다 열아홉 처녀가 경찰에 끌려가며 불렀다는 이 노래는 아무도 울어주지 않는 지리산 아래 사람들의 상처를 말없이 다독여 왔다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없이 쓰러져간 원혼의 넋은 아직도 못다부른 노래로 기억되고있다
최종대(62) 전 구례번영회장, 한의사 - 제 어렸들때도 모임을 가지고 이렇게 하게되면 반드시 산동애가 주인공 이야기가 나와가지고 그렇게 열아홉살에 나이도 열아홉살에 결혼도 못하고 노래 나오듯이 꽃봉오리가 피기전에 죽어갔다는 그 내용으로 해서 노래를 많이 불렀었습니다.
산동애가 작사,작곡 : 백순례(백부전) / 노래 문희원 -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없이 스러졌-네
살기좋은 산동마을 인심도 좋아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하고 까마귀 우는 곳에 나는 간다 노고단 화엄사 종소리야 너만은 너만은 영원토록 울어다오
잘있거라 산동아 한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못하고 갈길마다- 눈물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홍영기 교수 순천대 사학과 - 산동애가의 노랫말이든가 곡조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에는 지리산을 무대로 해서 좌우의 대비를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을때 였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구례지역의 주민들은 토벌군이라든가 빨치산들에 의해서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관계때문에 당시의 주민들의 경우에는 이중의 고통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런 점들이 형제들의 죽음이라든가 빨치산에 끌려가는 것이라든가 진압군에 의한 무고한 죽음이라든가 이런것들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 산동애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rO-ic6RWYM
아직도 못다 부른 노래 #2 산동애가 (특집다큐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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