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MBC 여순사건 70주년 특집 5부작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1부
- 날짜
- 2021.10.13 13:30
- 조회수
- 609
- 등록자
- 윤성현
0:05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0:15
1부 그해 10월, 버림받은 국민들
0:21
70년전 핏빛으로 물든땅은 우리의 기억너머로 사라졌다..
0:30
한홍구 역사학자 / 성공회대 교수 - 여수사건이라는 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가 설립된 후에 (정부가)첫번째로 행사한 대규모적인 폭력이였습니다.
0:45
1948년 혼돈의 대한민국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제주4.3 항쟁 발발 7월, 제헌국회의 간선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 당선
1:01
파국의 10월 제주 4.3을 진압하라! 제 14연대(당시 여수주둔)병력 일부제주파병 결정
1:17
"우리형제를 죽이는것을 거부한다" 10월 19일 제14연대 2천여 병사, 제주도 파병명령 거부 삼일만에 전남동부전역으로 확산되자 22일 계엄령 선포
1:35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많은 지역민들이 호응한 이유는)해방된 이후에 한국사회가 갖고 있던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점들 이를테면 토지개혁문제나 또는 친일파 척결의 문제나
1:47
이런것들이 3년이 지난 1948년에도 크게 개선되지가 않았습니다. 이런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1:58
*계엄 - 전시, 사변, 국가비상사태에서 당해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군의 관할하에 두는것
2:09
1948년 10월 22일 지역사령관이 여수,순천에 계엄선포 10월 25일 국무회의에서 추후 승인 그러나 일본의 계엄령을 적용한 것일 뿐 근거가 될 우리의 법률은 없었다
2:22
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 -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이 아니라) 지역을 담당하는 군 책임자가 계엄을 선포하고 나중에 국무회의를 승인을 받은 것은 법적인 하자가 있는 거죠.
2:33
계엄으로 인해 발생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 문제는 심각한 위헌행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병력의 1/5 투입병력 5천여명
2:50
우리나라 최초 육,해,공군(기갑연대, 항공대, 군함동원)합동작전 사건 발발 9일만인 10월 27일 진압군 여수 탈환
3:06
한홍구 역사학자 성공회대 교수 -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이 생긴 정치공동체 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동조한다면 앞으로의 통치에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3:15
'초전박살, 일벌백계(로 다스리자)' '우리에게 저항하면 어떻게 된다. 국가에 저항하면 어떻게 된다'를 보여준 겁니다.
3:24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미국 임시군사고문관)대로우 대위가 여수진압작전이 끝난 다음에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3:31
'진압군의 주요한 목표는 약탈과 강간이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사실 미군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3:45
대로우 대위가 여수진압작전의 총괄평가를 하게되는데요 거기에서 권고사항의 두번째가 '인간적 가치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입니다.
4:01
대로우 대위는 여수진압작전에서 한국군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두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4:12
이어진 가담자 색출작업!
4:18
신문기사 -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하도록 하라!" -이승만대통령 담화- 1948년 11월 5일(동아일보)
4:26
남원, 함양, 화순, 구례, 곡성, 광양, 벌교, 순천, 여수, 보성, 고흥, 장흥
4:36
여순사건 인명피해 현황 1948.11.1 전라남도 4,974명 1948.11.20 정부 3,260명 / 1949.1.10 정부 3,474명, 1949.10.25 전라남도 11,131명
자료출처: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4:52
이후로 정확한 피해 통계는 아직까지도 집계되지 않았다
4:58
여수지역 재산피해 화재로 인한 가옥 소실 1,500여호 재산피해액 100억원대 추정
불타는 여수시가지
5:07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여수같은 경우는 진압 작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8년 10월 26일과 27일날 시내 중심부가 완전히 불에타서 전소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5:22
시내가 불타고 있는데 진압군이 그 불을 끄지 못하게 해서 여수 서시장일대가 완전히 불에 타서 전소됩니다. 사람들이 삶을 영위할 근거가 완전히 사라져버린거죠.
5:38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지역공동체가 파괴된건 물론이죠 그러면서 여전히 좌우가 공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이후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나서지마라 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5:57
여순사건이 촉발한 현대사의 그늘
6:03
1948년 12월 1일 개인의 사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형 등 중형의 법적근거를 마련한 국가보안법 공포
6:18
1949년 6월 5일 좌익사상 전향자 관리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한국전쟁 발발 후 군,경에 의해 십만여명이 살해된 국민보도연맹 창설
6:31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유숙계를 실시해서 국민이 어디를 가든 숙박계를 쓰는제도를 만들었고 전 학원을 병영화하는 학도호국단을 창설하는 등 주민통제체제를 구축한겁니다.
6:48
그러면서 이제 반체제인사는 빨갱이라는 등식이 그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이지 않습니까?
7:00
비극의 역사는 왜 지워졌나
7:05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민간인 희생자의 95%가 진압군에 의해서 죽었고 14연대 군인과 좌익에 의해 죽은 사람들은 5%도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이 뭐냐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14연대 군인들과 좌익이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이 아니냐라고 (사실과 다르게)생각을 하고있습니다.
7:33
대한민국 정부가 진압작전 당시에 선전했던 그 논리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7:44
여순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7:49
한홍구 역사학자 성공회대 교수 - 어마어마한 죽음과 국가폭력이 왜 자행될 수 있었는가?
7:55
국가가 폭력을 행사할때 더군다나 군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할때, 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 아닙니까?
8:00
외적의 침략으로 부터 그런데 그 군을 동원해서 지켜야 할 국민을 치라고 했을때 군은 어떻게 상부의 명령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할까요?
8:14
아니면 그건아니지 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요?
8:17
그부분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여순사건의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MBC홈페이지 시청자의견 게시판 / 여수MBC 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 바랍니다 .
8:28
여수야화 작사 김초향, 작곡 이봉룡, 노래 남인수 - 여순사건을 소재로 해 우리나라 최초로 판매금지된 노래
왜놈이 물러갈땐 조용하더니 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하나요 의견이 안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집 태운 사람 얼굴좀 보자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기획 김지홍 / 구성 이혜련, 정안형 / 카메라 송정혁, 최재훈, 신대호 /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장대은
운전 김득중, 옥지수 / 음악 이수환 /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자료협조 제주MBC
타이틀그래픽 최윤정 /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연출 이동신
제작 여수mbc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2부 그해10월 버림받은 국민들link|https://www.youtube.com/watch?v=AjCgRQJulv8|[여순사건70주기 특별기획1]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0:15
1부 그해 10월, 버림받은 국민들
0:21
70년전 핏빛으로 물든땅은 우리의 기억너머로 사라졌다..
0:30
한홍구 역사학자 / 성공회대 교수 - 여수사건이라는 게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가 설립된 후에 (정부가)첫번째로 행사한 대규모적인 폭력이였습니다.
0:45
1948년 혼돈의 대한민국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제주4.3 항쟁 발발 7월, 제헌국회의 간선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 당선
1:01
파국의 10월 제주 4.3을 진압하라! 제 14연대(당시 여수주둔)병력 일부제주파병 결정
1:17
"우리형제를 죽이는것을 거부한다" 10월 19일 제14연대 2천여 병사, 제주도 파병명령 거부 삼일만에 전남동부전역으로 확산되자 22일 계엄령 선포
1:35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많은 지역민들이 호응한 이유는)해방된 이후에 한국사회가 갖고 있던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점들 이를테면 토지개혁문제나 또는 친일파 척결의 문제나
1:47
이런것들이 3년이 지난 1948년에도 크게 개선되지가 않았습니다. 이런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있었던 것입니다.
1:58
*계엄 - 전시, 사변, 국가비상사태에서 당해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 또는 전부를 군의 관할하에 두는것
2:09
1948년 10월 22일 지역사령관이 여수,순천에 계엄선포 10월 25일 국무회의에서 추후 승인 그러나 일본의 계엄령을 적용한 것일 뿐 근거가 될 우리의 법률은 없었다
2:22
김상겸 동국대 법학과 교수 - 계엄법이 제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통령이 아니라) 지역을 담당하는 군 책임자가 계엄을 선포하고 나중에 국무회의를 승인을 받은 것은 법적인 하자가 있는 거죠.
2:33
계엄으로 인해 발생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 문제는 심각한 위헌행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병력의 1/5 투입병력 5천여명
2:50
우리나라 최초 육,해,공군(기갑연대, 항공대, 군함동원)합동작전 사건 발발 9일만인 10월 27일 진압군 여수 탈환
3:06
한홍구 역사학자 성공회대 교수 -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이 생긴 정치공동체 안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동조한다면 앞으로의 통치에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3:15
'초전박살, 일벌백계(로 다스리자)' '우리에게 저항하면 어떻게 된다. 국가에 저항하면 어떻게 된다'를 보여준 겁니다.
3:24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미국 임시군사고문관)대로우 대위가 여수진압작전이 끝난 다음에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3:31
'진압군의 주요한 목표는 약탈과 강간이었다'는 표현을 합니다. 사실 미군의 입장에서는 함부로 표현할 수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3:45
대로우 대위가 여수진압작전의 총괄평가를 하게되는데요 거기에서 권고사항의 두번째가 '인간적 가치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입니다.
4:01
대로우 대위는 여수진압작전에서 한국군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두눈으로 본 사람입니다.
4:12
이어진 가담자 색출작업!
4:18
신문기사 - "..남녀아동이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하도록 하라!" -이승만대통령 담화- 1948년 11월 5일(동아일보)
4:26
남원, 함양, 화순, 구례, 곡성, 광양, 벌교, 순천, 여수, 보성, 고흥, 장흥
4:36
여순사건 인명피해 현황 1948.11.1 전라남도 4,974명 1948.11.20 정부 3,260명 / 1949.1.10 정부 3,474명, 1949.10.25 전라남도 11,131명
자료출처: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4:52
이후로 정확한 피해 통계는 아직까지도 집계되지 않았다
4:58
여수지역 재산피해 화재로 인한 가옥 소실 1,500여호 재산피해액 100억원대 추정
불타는 여수시가지
5:07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여수같은 경우는 진압 작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8년 10월 26일과 27일날 시내 중심부가 완전히 불에타서 전소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5:22
시내가 불타고 있는데 진압군이 그 불을 끄지 못하게 해서 여수 서시장일대가 완전히 불에 타서 전소됩니다. 사람들이 삶을 영위할 근거가 완전히 사라져버린거죠.
5:38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지역공동체가 파괴된건 물론이죠 그러면서 여전히 좌우가 공존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이후에 나온 이야기들이 '모난 돌이 정맞는다'고 나서지마라 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5:57
여순사건이 촉발한 현대사의 그늘
6:03
1948년 12월 1일 개인의 사상,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고 사형 등 중형의 법적근거를 마련한 국가보안법 공포
6:18
1949년 6월 5일 좌익사상 전향자 관리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한국전쟁 발발 후 군,경에 의해 십만여명이 살해된 국민보도연맹 창설
6:31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유숙계를 실시해서 국민이 어디를 가든 숙박계를 쓰는제도를 만들었고 전 학원을 병영화하는 학도호국단을 창설하는 등 주민통제체제를 구축한겁니다.
6:48
그러면서 이제 반체제인사는 빨갱이라는 등식이 그 무시무시한 국가보안법이지 않습니까?
7:00
비극의 역사는 왜 지워졌나
7:05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민간인 희생자의 95%가 진압군에 의해서 죽었고 14연대 군인과 좌익에 의해 죽은 사람들은 5%도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순사건이 뭐냐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14연대 군인들과 좌익이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이 아니냐라고 (사실과 다르게)생각을 하고있습니다.
7:33
대한민국 정부가 진압작전 당시에 선전했던 그 논리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7:44
여순사건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7:49
한홍구 역사학자 성공회대 교수 - 어마어마한 죽음과 국가폭력이 왜 자행될 수 있었는가?
7:55
국가가 폭력을 행사할때 더군다나 군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할때, 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 아닙니까?
8:00
외적의 침략으로 부터 그런데 그 군을 동원해서 지켜야 할 국민을 치라고 했을때 군은 어떻게 상부의 명령이니까 무조건 따라야 할까요?
8:14
아니면 그건아니지 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요?
8:17
그부분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여순사건의 우리에게 던지는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MBC홈페이지 시청자의견 게시판 / 여수MBC 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 바랍니다 .
8:28
여수야화 작사 김초향, 작곡 이봉룡, 노래 남인수 - 여순사건을 소재로 해 우리나라 최초로 판매금지된 노래
왜놈이 물러갈땐 조용하더니 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하나요 의견이 안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집 태운 사람 얼굴좀 보자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기획 김지홍 / 구성 이혜련, 정안형 / 카메라 송정혁, 최재훈, 신대호 /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장대은
운전 김득중, 옥지수 / 음악 이수환 /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자료협조 제주MBC
타이틀그래픽 최윤정 /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연출 이동신
제작 여수mbc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2부 그해10월 버림받은 국민들link|https://www.youtube.com/watch?v=AjCgRQJulv8|[여순사건70주기 특별기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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