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0주년 특집 5부작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4부
- 날짜
- 2021.10.13 14:03
- 조회수
- 660
- 등록자
- 윤성현
0:03
자막: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0:14
자막: 4부 70년의 악몽
0:27
자막: 전남 여수시 삼일동. 70년 전 호명마을의 참혹했던 늦가을.. 진압군에 의한 협력자 색출작업이 벌어지고, 모진 고문과 매질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던 사람들..
0:40
자막: 그 후유증으로 마흔을 넘기지 못한채 세상을 등진 이들이 많았다.. 여순 사건은 주민들에게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
0:47
주민: "지긋지긋해서 통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0:51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이영일: "저희들이 97년 때 조사를 해볼때 인터뷰 성공률이 10분의 1이었습니다."
1:00
이영일: "(인터뷰에)응하지를 않죠. 또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함 때문에.."
1:07
정신과 전문의 /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이영문: "(국가폭력은)실체를 알 수가 없는데 그게 거대한 힘으로 억누르니까 알 수 없는 것에서 압박을 받으니까 대항할 수도 없는거예요. 캄캄한 어둠속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만약에 본다면과 그런 상태와 같다는거죠."
1:20
이영문: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전혀 안되는 상태에서 받는 상처기 때문에 온통 다 세상이 적으로 보일 것이고 그런 마음상태가 읽혀져요. 국가가 사소한 어떤 그런거라도 국민들에 대한 억압이나 폭력이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40
자막: 70년 전 여수에 휘몰아친 거대한 국가폭력의 소용돌이는 이유도 명분도 없이 국민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1:52
자막: 진압군의 명령으로 여수서국민학교에 모이는 시민들
1:59
자막: 이어진 협력자 색출작업. 오른쪽 대열은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 이들 중 89명 11월 1일 처형...
2:08
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 여순사건 당시 8세 김천우: "(집)문이 부서지다시피 해가지고 뛰쳐나오니까, (군인들이) '다 손들고 나와라'이렇게 된겁니다. 쭈욱~ 사람들이 따라 내려 갔는데, 돌계단을 쭈욱 앉아 있더라고, 사람들이. 우리가 끝머리 가서 앉았어요."
2:22
김천우: "해가 뜨니까, 하~(한숨) 그.. 순경들이랄까 사찰계 형사라고 마을 그렇게 나중에 나는 알았습니다만은 민간복장을 하고"
2:36
김천우: "또 군인들이 뒤에 한 세명 두명이 따라다니면서 그 앞에 가신분들이 손짓을 하면 군인들이 끌고 나갔습니다."
2:47
김천우: "다섯명씩해서 줄을 지어 쭈욱 앉았었는데, '윗옷을 벗어봐라' '아랫도리를 내려봐' 손도 봐요. 손가락끝에 기름기 묻은 사람 그런사람들 끄집어 내서 끌어앉히는 거예요."
3:05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김득중: "머리가 짧거나, 군용팬티를 입었거나 한 사람은 14연대 군인이다. 그냥 간주해 버렸던거죠."
3:14
김득중: "또 흰고무신을 신었던 사람들(이 협력자로 분류된 이유는)은 천일고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3:20
김득중: "천일고무 사장이 김영준이라는 한민당의 (여수)지부장이었습니다.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한 다음에 흰 고무신을 주민들에게 일부분 나눠줬습니다."
3:33
김득중: "그런니까,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은 반란군에 협조한 것이다 라고 바로 간주를 해버렸습니다."
3:41
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 여순사건 당시 8세 김천우: "(운동장에)세워놓고 총살을 시작한겁니다. 그게 많게는 일곱명, 다섯명, 세명, 두명 이런식으로 순서없이 쏴죽이는 거예요."
3:55
김천우: "그러면 그 앉아있던 사람이 나오라면 나와서, (극도의 공포속에 시신운반까지 해야했던 사람들) 앞에 손들고 뒤에 발들고 해서 그 계단 한 여덜계단인가 올라가면 벚꽃나무 밑이 있어요. 거기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던져놓고 와요."
4:07
김천우: "그러면 그사람이 또죽어요. 그런식으로... 한 다섯시 이후에 찬바람이 부는거예요.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추위에 떨던 사람들) 사람들이 다 떨고 움츠러드니까 나중에는 방을 정하기를 남자가.. 나는 여자측에 들어갔어요. 여덜살"
4:25
김천우: "교실에서 잠을 잤어요. 그러다가 잠이드는 과정에 시끄러웠어요. 교실안이. 왜냐하니까, 그 안에서 교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교실에서.."
4:37
김천우: "아침 8시경, 8시경 되니까 집으로 돌려보내요.. (그러나 끝나지 않은 악몽 큰형의 실종..) 며칠후에 인자 장형을 찾고 다녔어요. 제 형수 되는 사람의 오빠두분이 그런 계통에 있었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4:53
김천우: "(처가의 좌익혐의때문에 고문받고)그래서 그 사람들 찾아내라.. 상송장이 되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요. 우리가 잤던 방. 어머니가 그뒷날부터 찰밥을 했어요. 찰밥을 그날로 아침에 가져가 보니까 윤천형님은 아침에 실려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는거에요."
자막: 형제묘 / 전남 여수시 만흥동
5:22
자막: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된 부역혐의자중 125명이 희생된 자리에 세워진 형제묘.
5:33
자막: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의지하라는 뜻으로 유족들이 조성..
5:45
자막: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잡혀온 여수여학생들
5:51
자막: 여순사건 가담학교 10개교 여수중, 여수여중, 순천중, 광양중, 벌교중, 고흥중 등 가담학생 280명 1948년 11월 30일 전남학무국 발표
6:02
여순사건 당시 여수중 3학년 홍석초: "서국민학교에 여수시민을 몰아넣었을때 학생들이 특히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가고 우리반에 학교가 반을 운영을 못하게 되어버렸어. 우리 위로 4학년 다니다가 우리반이 싹 없어졌습니다. 졸업장도 못타고 우리는. 그래가고 그때 여수학생들 무지,무지하게 죽었습니다."
6:30
자막: 전남구례군 산동면. 진압군과 빨치산(반군)이 충돌한 지리산 아래 산동마을. 빨치산에게 패한 진압군의 울분은 죄 없는 마을사람들에게로.. 진압군의 명령으로 젊은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6:50
여순사건 당시 9세 한준희: "(구덩이를)우들 파는 이유도 몰랐지.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때 총살해서 사람들을 묻어버리려고 판거였어. 이게 한 몇분만 늦었더라도 다 죽었어.. 그냥."
7:04
자막: 그 사실을 안 경찰서장의 제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 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 '나는 몰라요'.
한준희: "누가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라. 그것이 어른들이 하는말.. 모른다고 하라고.."
7:10
여순사건당시 9세 홍순례: "나보고 이야기를 해 시아버지가. '나는 뒤에 앉아가지고 용케 살았다.' 꼭 앉았는디 요리 조리 피했는데, 그 사람들 싹 죽어 나갔다고."
자막: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시아버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풍비박산이 난 마을
7:27
여순사건당시 8세 조순남: "탑동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
(전남여수시 삼일동)
7:32
여순사건당시 11세 홍양수: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었죠. 배운 사람들은 다 좌익사상이야. 좌익사상이야. 다죽었어, 다."
7:43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김득중: "진압과정에서 젊은층이 많이 희생이 됬습니다. 사회에서 버팀목이 되는 젊은 소장층이 여순사건을 통해서 증발하다시피 한 점입니다."
8:01
김득중: "이후에 지역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8:08
순천여고 역사교사 / 여순사건구술 수집 박병섭: "여순사건때 인재로 평가받는 그분들이 일거에 제거되면서 나머지 민중들이 볼때는 앞선 사람, 똑똑한 사람, 학식이 많았던 사람들이 모조리 제거된 거예요."
8:23
박병섭: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그런사람들의 전철을 밟지 안았으면 좋겠다 그러하니 설사 아무리 나서고 싶은 상황이더라도 절대로 나서서는 안돼 하는 것을 가정에서 부터 주입하게 된거거든요."
8:42
역사연구자 주철희: "이웃도 믿지못하는, 이웃도 눈치를 봐야하는. 그 이유가 여순사건이 발발한 이후 운동장에 모아놓고 손가락 총을 이용해서 협력자를 색출해내죠."
자막: 손가락 총 - 손가락으로 지목하면 재판없이 즉결처분
8:54
주철희: "그럼 이 협력자를 색출한 사람들은 자기와의 개인적 사감만 가지고 이들을 색출해서 형장의 이슬로 몰아 넣었거든요."
9:06
순천여고 역사교사 / 여순사건구술 수집 박병섭: "구술을 수집하면서 이런 사례를 봤어요. 14연대 군인이예요. 봉기를 했어요. 그런데 국가가 당시에 '자수하면 모든것을 용서해준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거예요."
9:23
박병섭: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권유해서 자수한 그 친구가 결국 희생을 당해버린 거예요. 그분은 차라리 자기가 국가를 믿고 자수하란 말을 안했으면 그 친구가 살아남았을 건데..(라는 자책을 했죠) 같은 마을 사람이예요."
9:43
박병섭: "그런데 자기가 나라를 믿고 같이 자수하자고 권유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죽게된게 그부분이 평생 한이 됐다는거예요."
9:56
자막: 70년동안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온 구례의 이윤재 어르신 그날의 기억을 잊을수없어 고통스럽습니다..
10:06
어르신 여순사건 당시 19세 이윤재: "지금도 그런걸 생각하면 아슬아슬해요. 꿈에도 나와요. 꿈을 꾸고나면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악몽..)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번에 잠을 못 잘때가 있어.."
10:29
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여순사건 당시 8세 김천우: "자다가도 가끔씩 보면 앞에서 쏴죽이는게.(생각나요) 몇 백명을 쏴 죽이는걸 내눈으로 봤으니까요. 그 현장에서 목격한 그것이. 형의 죽음으로 인해서."
10:39
자막: 형의 죽음으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고통
김천우: "내가 고통받았던 일. 그런일들이 엄습해 오니까 잊을수가 없어요. 하루도.. 그 잠자다가 꿈에도 총살당한 모습들, 자빠지는.. 자빠지는 모습, 들고가는거, 어른하게 비쳐요."
10:56
정신과 전문의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이영문: "국가폭력은 어쩔수 없는게 아니라 우리가 세금을 내고 우리가 일을 함으로써 국가가 성립된 건데 (국가를)만들어준 주인을 학대를 하고 트라우마를 주는 거니까 더 억울하고 대항하려해도 실체가 없으니까.(두렵고)"
11:15
이영문: "이 강대하고, 완전히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면서 분노만 차게 만드는 가장 나쁜 트라우마라고 분류가 될 수 있습니다."
11:22
자막: 국가폭력 트라우마는 사라지기 힘들다.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이 트라우마 치료의 첫 단계이다.
이영문: "이분들의 잃어버린 70년에 대한 것들을 서로가 보듬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같이 논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자막: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mbc홈페이지 시청자 의견 게시판 / 여수mbc 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바랍니다.
11:49
자막: 종고산에서 바라본 여수
여수블루스 - 강석오 작사, 박양희 편곡, 전인삼 노래 / 여순사건의 비극을 담은 곡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숨죽이며 불렀던 노래로 악보도 없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자막: 1940년대 여수
12:12
노래: "여수는 항구였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남쪽의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봐도 옛날을 불러봐도 재만 남은 이거리에 부슬부슬 궂은비만 내리네"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
기획: 김지홍 | 구성: 이혜련, 정안형 |
카메라: 송정혁, 정연우, 최유진, 최재훈, 신대호 |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
운전: 김득중, 옥지수 | 음악: 이수환 |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여수시 |
자료협조: 제주MBC,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
타이틀, 그래픽: 최윤정 |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
연출: 이동신 | 제작: 여수MBC |
4부 70년의 악몽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월~목 저녁 7시 5분에..
링크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ppv1Y0Juzug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4]
자막: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0:14
자막: 4부 70년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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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전남 여수시 삼일동. 70년 전 호명마을의 참혹했던 늦가을.. 진압군에 의한 협력자 색출작업이 벌어지고, 모진 고문과 매질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던 사람들..
0:40
자막: 그 후유증으로 마흔을 넘기지 못한채 세상을 등진 이들이 많았다.. 여순 사건은 주민들에게 여전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
0:47
주민: "지긋지긋해서 통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0:51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이영일: "저희들이 97년 때 조사를 해볼때 인터뷰 성공률이 10분의 1이었습니다."
1:00
이영일: "(인터뷰에)응하지를 않죠. 또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함 때문에.."
1:07
정신과 전문의 /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이영문: "(국가폭력은)실체를 알 수가 없는데 그게 거대한 힘으로 억누르니까 알 수 없는 것에서 압박을 받으니까 대항할 수도 없는거예요. 캄캄한 어둠속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만약에 본다면과 그런 상태와 같다는거죠."
1:20
이영문: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전혀 안되는 상태에서 받는 상처기 때문에 온통 다 세상이 적으로 보일 것이고 그런 마음상태가 읽혀져요. 국가가 사소한 어떤 그런거라도 국민들에 대한 억압이나 폭력이 있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1:40
자막: 70년 전 여수에 휘몰아친 거대한 국가폭력의 소용돌이는 이유도 명분도 없이 국민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다.
1:52
자막: 진압군의 명령으로 여수서국민학교에 모이는 시민들
1:59
자막: 이어진 협력자 색출작업. 오른쪽 대열은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 이들 중 89명 11월 1일 처형...
2:08
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 여순사건 당시 8세 김천우: "(집)문이 부서지다시피 해가지고 뛰쳐나오니까, (군인들이) '다 손들고 나와라'이렇게 된겁니다. 쭈욱~ 사람들이 따라 내려 갔는데, 돌계단을 쭈욱 앉아 있더라고, 사람들이. 우리가 끝머리 가서 앉았어요."
2:22
김천우: "해가 뜨니까, 하~(한숨) 그.. 순경들이랄까 사찰계 형사라고 마을 그렇게 나중에 나는 알았습니다만은 민간복장을 하고"
2:36
김천우: "또 군인들이 뒤에 한 세명 두명이 따라다니면서 그 앞에 가신분들이 손짓을 하면 군인들이 끌고 나갔습니다."
2:47
김천우: "다섯명씩해서 줄을 지어 쭈욱 앉았었는데, '윗옷을 벗어봐라' '아랫도리를 내려봐' 손도 봐요. 손가락끝에 기름기 묻은 사람 그런사람들 끄집어 내서 끌어앉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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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김득중: "머리가 짧거나, 군용팬티를 입었거나 한 사람은 14연대 군인이다. 그냥 간주해 버렸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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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중: "또 흰고무신을 신었던 사람들(이 협력자로 분류된 이유는)은 천일고무라는 회사가 있었습니다."
3:20
김득중: "천일고무 사장이 김영준이라는 한민당의 (여수)지부장이었습니다. 봉기군이 여수를 점령한 다음에 흰 고무신을 주민들에게 일부분 나눠줬습니다."
3:33
김득중: "그런니까, 흰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은 반란군에 협조한 것이다 라고 바로 간주를 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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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 여순사건 당시 8세 김천우: "(운동장에)세워놓고 총살을 시작한겁니다. 그게 많게는 일곱명, 다섯명, 세명, 두명 이런식으로 순서없이 쏴죽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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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우: "그러면 그 앉아있던 사람이 나오라면 나와서, (극도의 공포속에 시신운반까지 해야했던 사람들) 앞에 손들고 뒤에 발들고 해서 그 계단 한 여덜계단인가 올라가면 벚꽃나무 밑이 있어요. 거기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을 던져놓고 와요."
4:07
김천우: "그러면 그사람이 또죽어요. 그런식으로... 한 다섯시 이후에 찬바람이 부는거예요. (저녁 어스름이 내리고 추위에 떨던 사람들) 사람들이 다 떨고 움츠러드니까 나중에는 방을 정하기를 남자가.. 나는 여자측에 들어갔어요. 여덜살"
4:25
김천우: "교실에서 잠을 잤어요. 그러다가 잠이드는 과정에 시끄러웠어요. 교실안이. 왜냐하니까, 그 안에서 교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교실에서.."
4:37
김천우: "아침 8시경, 8시경 되니까 집으로 돌려보내요.. (그러나 끝나지 않은 악몽 큰형의 실종..) 며칠후에 인자 장형을 찾고 다녔어요. 제 형수 되는 사람의 오빠두분이 그런 계통에 있었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4:53
김천우: "(처가의 좌익혐의때문에 고문받고)그래서 그 사람들 찾아내라.. 상송장이 되어서 방으로 돌아왔다 그래요. 우리가 잤던 방. 어머니가 그뒷날부터 찰밥을 했어요. 찰밥을 그날로 아침에 가져가 보니까 윤천형님은 아침에 실려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는거에요."
자막: 형제묘 / 전남 여수시 만흥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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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종산국민학교에 수용된 부역혐의자중 125명이 희생된 자리에 세워진 형제묘.
5:33
자막: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의지하라는 뜻으로 유족들이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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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잡혀온 여수여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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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여순사건 가담학교 10개교 여수중, 여수여중, 순천중, 광양중, 벌교중, 고흥중 등 가담학생 280명 1948년 11월 30일 전남학무국 발표
6:02
여순사건 당시 여수중 3학년 홍석초: "서국민학교에 여수시민을 몰아넣었을때 학생들이 특히 많이 죽었습니다. 그래가고 우리반에 학교가 반을 운영을 못하게 되어버렸어. 우리 위로 4학년 다니다가 우리반이 싹 없어졌습니다. 졸업장도 못타고 우리는. 그래가고 그때 여수학생들 무지,무지하게 죽었습니다."
6:30
자막: 전남구례군 산동면. 진압군과 빨치산(반군)이 충돌한 지리산 아래 산동마을. 빨치산에게 패한 진압군의 울분은 죄 없는 마을사람들에게로.. 진압군의 명령으로 젊은이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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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당시 9세 한준희: "(구덩이를)우들 파는 이유도 몰랐지. 나중에 알고보니까 그때 총살해서 사람들을 묻어버리려고 판거였어. 이게 한 몇분만 늦었더라도 다 죽었어..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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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그 사실을 안 경찰서장의 제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 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 '나는 몰라요'.
한준희: "누가 물어보면 모른다고 해라. 그것이 어른들이 하는말.. 모른다고 하라고.."
7:10
여순사건당시 9세 홍순례: "나보고 이야기를 해 시아버지가. '나는 뒤에 앉아가지고 용케 살았다.' 꼭 앉았는디 요리 조리 피했는데, 그 사람들 싹 죽어 나갔다고."
자막: 눈앞에서 죽음을 목격한 시아버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풍비박산이 난 마을
7:27
여순사건당시 8세 조순남: "탑동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었어."
(전남여수시 삼일동)
7:32
여순사건당시 11세 홍양수: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었죠. 배운 사람들은 다 좌익사상이야. 좌익사상이야. 다죽었어, 다."
7:43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김득중: "진압과정에서 젊은층이 많이 희생이 됬습니다. 사회에서 버팀목이 되는 젊은 소장층이 여순사건을 통해서 증발하다시피 한 점입니다."
8:01
김득중: "이후에 지역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그런 계기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8:08
순천여고 역사교사 / 여순사건구술 수집 박병섭: "여순사건때 인재로 평가받는 그분들이 일거에 제거되면서 나머지 민중들이 볼때는 앞선 사람, 똑똑한 사람, 학식이 많았던 사람들이 모조리 제거된 거예요."
8:23
박병섭: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그런사람들의 전철을 밟지 안았으면 좋겠다 그러하니 설사 아무리 나서고 싶은 상황이더라도 절대로 나서서는 안돼 하는 것을 가정에서 부터 주입하게 된거거든요."
8:42
역사연구자 주철희: "이웃도 믿지못하는, 이웃도 눈치를 봐야하는. 그 이유가 여순사건이 발발한 이후 운동장에 모아놓고 손가락 총을 이용해서 협력자를 색출해내죠."
자막: 손가락 총 - 손가락으로 지목하면 재판없이 즉결처분
8:54
주철희: "그럼 이 협력자를 색출한 사람들은 자기와의 개인적 사감만 가지고 이들을 색출해서 형장의 이슬로 몰아 넣었거든요."
9:06
순천여고 역사교사 / 여순사건구술 수집 박병섭: "구술을 수집하면서 이런 사례를 봤어요. 14연대 군인이예요. 봉기를 했어요. 그런데 국가가 당시에 '자수하면 모든것을 용서해준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거예요."
9:23
박병섭: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권유해서 자수한 그 친구가 결국 희생을 당해버린 거예요. 그분은 차라리 자기가 국가를 믿고 자수하란 말을 안했으면 그 친구가 살아남았을 건데..(라는 자책을 했죠) 같은 마을 사람이예요."
9:43
박병섭: "그런데 자기가 나라를 믿고 같이 자수하자고 권유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죽게된게 그부분이 평생 한이 됐다는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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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 70년동안 고문후유증에 시달려온 구례의 이윤재 어르신 그날의 기억을 잊을수없어 고통스럽습니다..
10:06
어르신 여순사건 당시 19세 이윤재: "지금도 그런걸 생각하면 아슬아슬해요. 꿈에도 나와요. 꿈을 꾸고나면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악몽..)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대번에 잠을 못 잘때가 있어.."
10:29
종산국민학교 협력자 색출 목격 여순사건 당시 8세 김천우: "자다가도 가끔씩 보면 앞에서 쏴죽이는게.(생각나요) 몇 백명을 쏴 죽이는걸 내눈으로 봤으니까요. 그 현장에서 목격한 그것이. 형의 죽음으로 인해서."
10:39
자막: 형의 죽음으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고통
김천우: "내가 고통받았던 일. 그런일들이 엄습해 오니까 잊을수가 없어요. 하루도.. 그 잠자다가 꿈에도 총살당한 모습들, 자빠지는.. 자빠지는 모습, 들고가는거, 어른하게 비쳐요."
10:56
정신과 전문의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 대표 이영문: "국가폭력은 어쩔수 없는게 아니라 우리가 세금을 내고 우리가 일을 함으로써 국가가 성립된 건데 (국가를)만들어준 주인을 학대를 하고 트라우마를 주는 거니까 더 억울하고 대항하려해도 실체가 없으니까.(두렵고)"
11:15
이영문: "이 강대하고, 완전히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면서 분노만 차게 만드는 가장 나쁜 트라우마라고 분류가 될 수 있습니다."
11:22
자막: 국가폭력 트라우마는 사라지기 힘들다.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이 트라우마 치료의 첫 단계이다.
이영문: "이분들의 잃어버린 70년에 대한 것들을 서로가 보듬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같이 논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자막: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mbc홈페이지 시청자 의견 게시판 / 여수mbc 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바랍니다.
11:49
자막: 종고산에서 바라본 여수
여수블루스 - 강석오 작사, 박양희 편곡, 전인삼 노래 / 여순사건의 비극을 담은 곡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숨죽이며 불렀던 노래로 악보도 없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자막: 1940년대 여수
12:12
노래: "여수는 항구였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남쪽의 항구 어버이 혼이 우는 빈터에 서서 옛날을 불러봐도 옛날을 불러봐도 재만 남은 이거리에 부슬부슬 궂은비만 내리네"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
기획: 김지홍 | 구성: 이혜련, 정안형 |
카메라: 송정혁, 정연우, 최유진, 최재훈, 신대호 |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
운전: 김득중, 옥지수 | 음악: 이수환 |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여수시 |
자료협조: 제주MBC,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
타이틀, 그래픽: 최윤정 |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
연출: 이동신 | 제작: 여수MBC |
4부 70년의 악몽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월~목 저녁 7시 5분에..
링크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ppv1Y0Juzug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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