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특별기획 증인] #1 김양기 인터뷰
- 날짜
- 2021.12.06 11:22
- 조회수
- 353
- 등록자
- 윤성현
여수10.19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첫번째 유족 김양기 1950년 9월 28일생 여수국민보도연맹 애기섬 희생자 아들
Q)아버지는 어떤분이셨어요?
아버지는 원래 제 아버지는 좀 그시절 같으면 좀 인텔리 였다고 봐요. 일본동경에서 동경철도국에 근무하고 있었어요
해방된 무렵에. 해방되기 전에 한국을, 조부님이 나오라고 더 거기있으면 안된다고 나오라고 불러서 한국에 나왔는데,
(그게 몇년도였어요?) 그게 45년도. 나온게
그러다가 해방이 됐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국민학교 교편을 잡았어요 그러니까 여순사건이 발발할 당시에 아버지는 여수초등학교 여수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어요.
김양기씨의 아버지는 좌익운동혐의로 8개월을 복역했다. 출소 이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김양기씨의 아버지는 김씨가 태어나기 전, 여수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정권이 보도연맹에 가입돼 있는 사람들을 소집해서 애기섬 앞바다에 가서...
(보도연맹사건때 돌아가셨구나...)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보도연맹에 가입을 하도록 했으니까, 정부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특혜가 있는 줄 알고 다들 그랬을거 아니야?
그시절에는 빨갱이라고 그러면 손가락질만 해도 거기서 즉결처분하는 시절아니야 8개월 복역했다고 하면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들어 나는
그렇잖아요 조금 그게 진짜 정말로 가담한 사람들은 중형을 받았거든. 무기, 사형, 15년.. 8개월 살았다면 그거는 그주위에서 구경했던 사람밖에 안된다고 나는 판단돼요. 그거는 내 추정이지만..
Q)유년시절은 어떠셨어요?
(여수)돌산이 외갓집이었는데, 외갓집에서 아홉살때까지 외갓집에서 살다가 어머니가 재가를 했어요. 재혼을 했고 그러다보니까 외갓집에서 살수도 없잖아 그래서 본가로 오게 된거예요 친할머니, 거기에 할머니가 살아계셨고 할아버지는 그무렵에는 돌아가셨고 우리 할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어. 항상 '휴유.. 휴유..' 그생떼같은 아들이 느닷없이 죽었는데, 죽임을 당했는데.. 화병 안들사람이, 할머니가 어디있겠어, 부모가. 학교도 야간중학교 다니고, 고등학교도 겨우겨우 졸업을 제대로 못했어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 그러다 군대를 가고 이제 일본에 숙부들이 세분이 살고 계셨기때문에 그 숙부들이 나오셔서 한국으로 몇 십년만에 나오셨어. 만나서 일본으로 한번 오라고 초청을 해주셔서 내가 일본으로 가게됐던 거지.
(야간고등학교 졸업하신 후에 몇년도에 건너가셨어요?)내가 24살때 군대갔다와서
김양기씨는 일본유학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 회고한다.
여기는 친적이 없어. 형제간도 없고 나를 누가 보살펴줄만한 사람들이 없어요. 일본에는 작은 아버지들이 세분이나 있었고, 사촌들도 있고 거기가 도리어 고향같은 기분이었어. 그시절에는 어렸을때는 정을.. 뭐라고 하나 작은 아버지들은 내 혈육의 정이랄까 그런것을 일본에서 느꼈지. 여기서는 항상 고아처럼 남들한테 천대받고 그러고 살았어요. (처음으로 가족이라고 느끼셨겠어요) 그런 가족애를 거기서 느낀거죠 나는 인생이 좀 기구해
Q) 간첩혐의로 잡혀가셨죠? 기억하세요 혹시 몇년도에..
86년도 (몇 월 며칠인지 기억나세요?) 2월 21일
(어떤상황에서 처음에 들으셨어요?) 내가 그때 서울에, 그당시에 21일이면 구정을 쇠고 한 보름정도나 됐을까? 구정 한 열흘정도 조금 더 지났을까 그 무렵이예요. 그무렵에 일본의 숙부중에 둘째 숙부가 그때 몸이 안좋아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반신불구가 되어있어. 우리나라말로 중풍. 그래서 한국에 나와서 우리집에 와서 침이라도 맞아보겠다고 그래서 구정때 와서 한 20일 우리집에서 지내다가 갈려고.. 숙부가 출국하신다고 올라오신다고 그래서 그러면 롯데백화점 앞에서 만나자 그러고 만나러 나갔는데 숙부가 안와 그리고 다른사람이 이상하게 왔어. 와서 숙부가 비행장에서 쓰러져서 광주대학병원으로 지금 가셨다고. 빨리 광주로 내려가자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정신이 팍 나가버렸지 큰일났다. 이거 보통이 아니구나 더구나 중풍으로 쓰러졌던 환자인데 일본의 가족들한테 어떻게 이야기를 설명을 해야할까 하고 온갖머리가.. 허겁지겁 그사람 따라서 광주로 간거야 그랬더니 광주가서 택시타라 그러고 택시를 탔는데 머리를 뒷좌석에 머리를 탁. 아무것도 못보게 밖을 못보게 처박더라고 (같이갔던 사람이?) 그러고 가서 내린 곳이 505보안대야. (왔던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세요?) 아유 나지 아주 몸이 건장하고 거기서 가니까 벌써 딱 기다리고 있어. 그사람들이. 군인들이
"아 이놈이 김양기야?" 그러면서 양쪽으로 탁 낚아채더니 지하실로 끌고들어가 그러고 옷을 싹 벗겨 그러고 군복으로 딱 갈아입히더라고
광주 505보안대에서 김양기씨는 43일동안 고문을 받았다.
그날 저녁부터 잠을 안재우는거야 지켜서서. 앉혀놓고 그잠을 한 5일이나 안잤을까? 4일을 안잤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안자니까 환각이 보이더라. 이벽이 막 움직여 앞에있는 책상이 움직이고 그러다 정신을 잃어버렸어. (안재우면서 뭘 물어보고 이랬던거예요?) 그러지 뭘쓰라그러고( 뭘쓰라그래요?)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것 친구, 친적, 동창, 나와 관계된 사람 전부 다쓰라고그래.. 그러면서 잠을 안재우는거야 옆에서 딱 지키고 앉아서(진짜 힘드셨겠네요) 그래서 정신을 잃어버렸는데 그다음날 부터는 어제 저녁에 네가 그랬잖아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어제 내가 그런이야기를.. 가서 조총련을 만났고.. 그사람한테 교육을 받고.. 자기들이 가르쳐줘
그것이 43일동안이야. 물고문도, 고문도 뭐 몽둥이 두드려 패고, 볼펜같은거 이렇게 엮어서 꺾고 이런것은 보통이고 일상적인 고문이야 이건 보통이고 그런고문은 전기고문만 하면 큰 고통을 잘 몰라 물을 뿌려야해. 몸에 물이 축축하게 젖어서 있어야 전기를 돌리면 팍팍팍 하고 전기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막 벌떡벌떡 일어나 그것을 얼마나 당했는지 몰라. 그러니까 걔들이 한 그런것은 통증이고 이런것을 잘 못느끼겠더라고 신경이 죽어버리니까. 감각이
Q)왜 간첩이라고 하던가요?
아버지가 반란사건에 연루됐다. 그거는 보안대 지하실에서 수사관들이 나를 고문할때 한 이야기야. 그때서야 아 그랬었구나. 그러니까 내 공소장이 공소장 모두진술에 걔들이 써놓은 모두진술에 피고인은 본적지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에 가담타가 검거되어 처형당한 망부 김 누구의 유복자로 태어나서.. 이게 모두 진술이었어. 공소장의..
나도 처음에는 아버지가 그런 여순사건에 연루됐다 이렇게 한 사실을 모르고 컸어요.
Q)해명할 기회가 없으셨어요?
광주지검에 검찰청에 갔을 때 검사한테 전부 '너희들, 내가 검사한테 가면 검사한테 너희들이 나한테 고문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 전부 이야기를 하겠다. 폭로하겠다'했지 어리석게도 그 검사도 똑같은 패거리인줄 모르고 정의가 어딨어. 정의가. 나는 죽을 힘을 다해서 나는 이런사실이 없습니다. 저사람들이 나를 그동안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몽둥이질하고 이런저런 고문을 하면서 이것을 만들어 놓은것이지 거기서 불러놓은 대로 나는 받아썼다. 나는 한사실이 없다. 검사가 뭐라고 하는줄 알아?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서 입에 게거품 물면서 "이자식아, 네가 부인을 하려면 보안대에서 부인하지 여기와서 부인하면 나보고 어쩌란말이야!" 슬리퍼를 벗어서 뺨을 치고 하늘이 무너진거야. 하늘이 오로지 하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런 용기를 내서 죽을 힘을 내서 그렇게 했는데, 그런.. 검사가 그렇게 해버리니까 나는 말을 할수가 없어. 그때부터. 그때부터 진술이라는것은 없었고 한쪽에가서 앉았고 그 검사 입회 서기가 타자쳐서, 그날 한 열시쯤 갔는데 한 열두시간 조서 받는다고 그걸 한 열두시간 한 모양이네 내가 교도소에 들어갔을때는 밤 열한시였으니까. 나중에 자기들이 내손이렇게 잡고 지장을 요렇게.. 종이를 요리. 한사람은 이렇게 내 팔 잡고
(그렇게 부인도 못하고 들어가셨네요..) 그 재판 받으면서도 참 많은 에피소드가 있어 내가 재판을 하면서도 내가 인정을 한것은 한건이 없어 모두 자기들이 만든 범죄행위야 아마 그런 공안사건에 그렇게 한 사건이 없을거야. 그런데도 소용없어 그래도 유죄가 돼 증인이 교도관이 나왔어. 검사가 때리는걸 봤습니다. 발로차는것을 봤습니다. 사형시킨다고 했습니다. 증언해도 소용이 없어요 재판부를 싹 바꿔버려 판사들을 그다음 재판 기일에 나가니까 판사들이 싹 바꿔지고 없어 그래서 재판이고 뭐고 없이 결심, 해가지고 이름도 안잊어버리네. 정광일이라고 부장판사 정광일.
1986년 투옥된 김양기씨는 7년형을 받고 5년이 지나 1991년 출소했다
Q)출소이후에는 어떻게 사셨어요?
간첩죄로 징역을 살고 나온사람을 누가 취직을 시켜줄거야. 내가하던 직업은 이미 공중에 분해되어 버렸고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노동일을 하려고 해도 경찰들이 찾아다니는것때문에 그것도 못해 하다못해 친구들 집이나 아는 지인들집에 내가 들렀다 경찰이 와서 물어보더라는거야 양기 뭐하러왔더냐? 밤1시, 12시, 1시 그때도 전화가오고. 그때만해도 우리 아이들이 전화만 왔다하면 시퍼렇게 질려가지고 아빠또 잡혀가? 기가막힐 노릇아니야. 이거 그러다 보니까 사회에 대한 분노가 왜내가 이런 고통을 겪고 살아야 하는가. 원망과 분노. 그런것들이 한이 가슴에 쌓여서 그러다가 이밭에 와서 집사람이, 우리밭이 있으니 그밭으로 한번 갑시다 여기와서 봄에 콩을 심더라고. 그러니까 며칠 후에 오니까 콩이 그콩이 머리를 들고 솟아나와. 그게 그렇게 신기해 그러니까 그 콩이 잎이되는거야 거기에 싹 나는것을 보고 그런것에 빠져서, 그런것에 마음을 주고.. 여기오면 pd님이 보시다시피 누가 나를 간섭할 사람도 없고, 흉 볼 사람도 없고 나혼자서 여기서 그냥 시간가는줄 모르게.. 만약에 그렇지 않았으면 폐인이 내가 되었거나 이미 죽었을거야 그울분 달랜다고 술이나 마셨을 거고. 술안마셨겠어요? 마시지..
김양기씨는 23년을 싸운 끝에 지난 2009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심 재판부는 "국가의 존립 근거인 국민에 대하여 그 신체의 자유를 아무런 근거없이 속박하였고, 최후의 인권 수호기관인 법원은 눈과 귀를 막은 채 공허한 증거들이 그려낸 허상만을 바라보았다 엄혹한 시대에서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피고인의 인권이 침해된 정도가 너무나도 중대하다" 고 판시했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은 군부정권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승소한 후에는 나처럼 이렇게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된 선생님들 찾아다니면서 재심하라고 쫓아다니고, 설득하고 그런 일에 몇년을 그러고 다녔어요.
(만나보니까 주로 어떤분들, 선생님처럼 여순사건에 관련된 분들인가요?) 아니예요 그런사람은 나혼자고 납북어부들이 많고, 고기잡으러 갔다가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북한에 납북됐다가 넘어온 사람들 그런사람들 있고, 또 재일교포들, 일본이 고향이라고 오면 김포에서 딱 잡아서 데리고 가서 간첩만들어 버리고 일본 간첩단 사건, 이런것 전부 무죄 받았잖아요 지금 현재 내가 할때만해도, 내가 법정싸움하고 재심싸움할 때만해도 그런 사람들 밖에 나오지 않았어 믿지를 않고.
(몇년동안 그러셨으면 일상생활, 일하시는..) 일도 못하지 군산에 재판이 있으면 피해자들 가족들 만나러 가서 위로해주고 간첩사건이라고 하는데 누가 방청객이 나와서 그사람들 위로해줄 사람이 누가있겠어 힘내라고 여기서부터 거기 쫓아가고, 부산가고, 서울가고 우리집에 고속버스표가 이렇게 있었어 (선생님 마음에 응어리진것때문에..) 그렇죠 그런 억울한 사람들이 나오면 안되잖아
Q)아직도 한이 남으셨죠?
그 고문을 하고 사건을 조작하고 했던 그런 사람들은 훈장을 받고 20년, 30년 동안 국가의 혜택을 다 받으면서 살아 그러면 그 사람들 그대로 용서를 해야하는가? 그 훈장 받은거 다 압수해야 하고, 취소해야하고 그동안 받았던거 구상권 청구하고 전부다 물어내게 해야하는거 아니야 그렇잖아요 걔들이 그 시절만 해도 전두환이 간첩잡아라, 간첩잡아라 그랬거든 그래 놓으니까 간첩으로 만든거야 그러면 상금주고, 표창장 받고, 훈장받고
이제 한 오십몇명인가, 이십몇명인가 밖에 회수를 못했어요 훈장받은 사람 것은 전부 회수해야하는것 아닌냐 판결이 이렇게 나고, 이렇게 됐으면 그들이 왜 지금도 국가 특혜를 받고 살아야 하냐. 그런문제죠. (그래야 마음이 풀리시는.. )(마음같으면 똑같이..) 나는 고문좀 해보고 싶어. 그사람들 나한테 했던것처럼..
Q)고문 후유증 아직 있으시죠?
저녁에는 잠을 못자지만, 남보기에는 싱싱한것 같이 보여 그런데 몸에는 골병이 들어가고 있어요 비가오면 이런곳은 아리고 그런것은 아프다고 할수가 없죠
췌장도 들어내고 없죠. 나는 쓸개빠진 놈이야 그렇게 웃고살아. 쓸개가 없어서..
Q)앞으로 소원이 있다면?
여순사건이 옛날 과거의 사건이 아니예요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예요 그렇잖아요 나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니까 희생자가 생기니까. 내가 왜 고문을 당하고 여순사건 특별법이 이번에는 틀림없이 통과가 되어서 그분들의 원혼을 좀 달래주고, 추모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면 또, 명예회복을 시켜주었으면.. 그것은 국가적으로 우리가 당한 유족끼리 할것이 아니라 국가가 저지른 죄니까 국가 범죄니까 국가에서 그 사죄를 해야한다고 봐요 그래서 그분들의 그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늦었지만 남아있는 우리,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게 되기를 저는 소원합니다.
제 21대 국회에서는 여순 10.19 특별법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
여수10.19 특별법제정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본 영상은 마포꽃점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첫번째 유족 김양기 1950년 9월 28일생 여수국민보도연맹 애기섬 희생자 아들
Q)아버지는 어떤분이셨어요?
아버지는 원래 제 아버지는 좀 그시절 같으면 좀 인텔리 였다고 봐요. 일본동경에서 동경철도국에 근무하고 있었어요
해방된 무렵에. 해방되기 전에 한국을, 조부님이 나오라고 더 거기있으면 안된다고 나오라고 불러서 한국에 나왔는데,
(그게 몇년도였어요?) 그게 45년도. 나온게
그러다가 해방이 됐어요. 그러니까 이번에 국민학교 교편을 잡았어요 그러니까 여순사건이 발발할 당시에 아버지는 여수초등학교 여수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어요.
김양기씨의 아버지는 좌익운동혐의로 8개월을 복역했다. 출소 이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김양기씨의 아버지는 김씨가 태어나기 전, 여수국민보도연맹 학살 사건으로 희생되었다.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정권이 보도연맹에 가입돼 있는 사람들을 소집해서 애기섬 앞바다에 가서...
(보도연맹사건때 돌아가셨구나...)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보도연맹에 가입을 하도록 했으니까, 정부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특혜가 있는 줄 알고 다들 그랬을거 아니야?
그시절에는 빨갱이라고 그러면 손가락질만 해도 거기서 즉결처분하는 시절아니야 8개월 복역했다고 하면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들어 나는
그렇잖아요 조금 그게 진짜 정말로 가담한 사람들은 중형을 받았거든. 무기, 사형, 15년.. 8개월 살았다면 그거는 그주위에서 구경했던 사람밖에 안된다고 나는 판단돼요. 그거는 내 추정이지만..
Q)유년시절은 어떠셨어요?
(여수)돌산이 외갓집이었는데, 외갓집에서 아홉살때까지 외갓집에서 살다가 어머니가 재가를 했어요. 재혼을 했고 그러다보니까 외갓집에서 살수도 없잖아 그래서 본가로 오게 된거예요 친할머니, 거기에 할머니가 살아계셨고 할아버지는 그무렵에는 돌아가셨고 우리 할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셨어. 항상 '휴유.. 휴유..' 그생떼같은 아들이 느닷없이 죽었는데, 죽임을 당했는데.. 화병 안들사람이, 할머니가 어디있겠어, 부모가. 학교도 야간중학교 다니고, 고등학교도 겨우겨우 졸업을 제대로 못했어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고 그러다 군대를 가고 이제 일본에 숙부들이 세분이 살고 계셨기때문에 그 숙부들이 나오셔서 한국으로 몇 십년만에 나오셨어. 만나서 일본으로 한번 오라고 초청을 해주셔서 내가 일본으로 가게됐던 거지.
(야간고등학교 졸업하신 후에 몇년도에 건너가셨어요?)내가 24살때 군대갔다와서
김양기씨는 일본유학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 회고한다.
여기는 친적이 없어. 형제간도 없고 나를 누가 보살펴줄만한 사람들이 없어요. 일본에는 작은 아버지들이 세분이나 있었고, 사촌들도 있고 거기가 도리어 고향같은 기분이었어. 그시절에는 어렸을때는 정을.. 뭐라고 하나 작은 아버지들은 내 혈육의 정이랄까 그런것을 일본에서 느꼈지. 여기서는 항상 고아처럼 남들한테 천대받고 그러고 살았어요. (처음으로 가족이라고 느끼셨겠어요) 그런 가족애를 거기서 느낀거죠 나는 인생이 좀 기구해
Q) 간첩혐의로 잡혀가셨죠? 기억하세요 혹시 몇년도에..
86년도 (몇 월 며칠인지 기억나세요?) 2월 21일
(어떤상황에서 처음에 들으셨어요?) 내가 그때 서울에, 그당시에 21일이면 구정을 쇠고 한 보름정도나 됐을까? 구정 한 열흘정도 조금 더 지났을까 그 무렵이예요. 그무렵에 일본의 숙부중에 둘째 숙부가 그때 몸이 안좋아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반신불구가 되어있어. 우리나라말로 중풍. 그래서 한국에 나와서 우리집에 와서 침이라도 맞아보겠다고 그래서 구정때 와서 한 20일 우리집에서 지내다가 갈려고.. 숙부가 출국하신다고 올라오신다고 그래서 그러면 롯데백화점 앞에서 만나자 그러고 만나러 나갔는데 숙부가 안와 그리고 다른사람이 이상하게 왔어. 와서 숙부가 비행장에서 쓰러져서 광주대학병원으로 지금 가셨다고. 빨리 광주로 내려가자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정신이 팍 나가버렸지 큰일났다. 이거 보통이 아니구나 더구나 중풍으로 쓰러졌던 환자인데 일본의 가족들한테 어떻게 이야기를 설명을 해야할까 하고 온갖머리가.. 허겁지겁 그사람 따라서 광주로 간거야 그랬더니 광주가서 택시타라 그러고 택시를 탔는데 머리를 뒷좌석에 머리를 탁. 아무것도 못보게 밖을 못보게 처박더라고 (같이갔던 사람이?) 그러고 가서 내린 곳이 505보안대야. (왔던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세요?) 아유 나지 아주 몸이 건장하고 거기서 가니까 벌써 딱 기다리고 있어. 그사람들이. 군인들이
"아 이놈이 김양기야?" 그러면서 양쪽으로 탁 낚아채더니 지하실로 끌고들어가 그러고 옷을 싹 벗겨 그러고 군복으로 딱 갈아입히더라고
광주 505보안대에서 김양기씨는 43일동안 고문을 받았다.
그날 저녁부터 잠을 안재우는거야 지켜서서. 앉혀놓고 그잠을 한 5일이나 안잤을까? 4일을 안잤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안자니까 환각이 보이더라. 이벽이 막 움직여 앞에있는 책상이 움직이고 그러다 정신을 잃어버렸어. (안재우면서 뭘 물어보고 이랬던거예요?) 그러지 뭘쓰라그러고( 뭘쓰라그래요?)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것 친구, 친적, 동창, 나와 관계된 사람 전부 다쓰라고그래.. 그러면서 잠을 안재우는거야 옆에서 딱 지키고 앉아서(진짜 힘드셨겠네요) 그래서 정신을 잃어버렸는데 그다음날 부터는 어제 저녁에 네가 그랬잖아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어제 내가 그런이야기를.. 가서 조총련을 만났고.. 그사람한테 교육을 받고.. 자기들이 가르쳐줘
그것이 43일동안이야. 물고문도, 고문도 뭐 몽둥이 두드려 패고, 볼펜같은거 이렇게 엮어서 꺾고 이런것은 보통이고 일상적인 고문이야 이건 보통이고 그런고문은 전기고문만 하면 큰 고통을 잘 몰라 물을 뿌려야해. 몸에 물이 축축하게 젖어서 있어야 전기를 돌리면 팍팍팍 하고 전기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막 벌떡벌떡 일어나 그것을 얼마나 당했는지 몰라. 그러니까 걔들이 한 그런것은 통증이고 이런것을 잘 못느끼겠더라고 신경이 죽어버리니까. 감각이
Q)왜 간첩이라고 하던가요?
아버지가 반란사건에 연루됐다. 그거는 보안대 지하실에서 수사관들이 나를 고문할때 한 이야기야. 그때서야 아 그랬었구나. 그러니까 내 공소장이 공소장 모두진술에 걔들이 써놓은 모두진술에 피고인은 본적지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에 가담타가 검거되어 처형당한 망부 김 누구의 유복자로 태어나서.. 이게 모두 진술이었어. 공소장의..
나도 처음에는 아버지가 그런 여순사건에 연루됐다 이렇게 한 사실을 모르고 컸어요.
Q)해명할 기회가 없으셨어요?
광주지검에 검찰청에 갔을 때 검사한테 전부 '너희들, 내가 검사한테 가면 검사한테 너희들이 나한테 고문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 전부 이야기를 하겠다. 폭로하겠다'했지 어리석게도 그 검사도 똑같은 패거리인줄 모르고 정의가 어딨어. 정의가. 나는 죽을 힘을 다해서 나는 이런사실이 없습니다. 저사람들이 나를 그동안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몽둥이질하고 이런저런 고문을 하면서 이것을 만들어 놓은것이지 거기서 불러놓은 대로 나는 받아썼다. 나는 한사실이 없다. 검사가 뭐라고 하는줄 알아?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서 입에 게거품 물면서 "이자식아, 네가 부인을 하려면 보안대에서 부인하지 여기와서 부인하면 나보고 어쩌란말이야!" 슬리퍼를 벗어서 뺨을 치고 하늘이 무너진거야. 하늘이 오로지 하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그런 용기를 내서 죽을 힘을 내서 그렇게 했는데, 그런.. 검사가 그렇게 해버리니까 나는 말을 할수가 없어. 그때부터. 그때부터 진술이라는것은 없었고 한쪽에가서 앉았고 그 검사 입회 서기가 타자쳐서, 그날 한 열시쯤 갔는데 한 열두시간 조서 받는다고 그걸 한 열두시간 한 모양이네 내가 교도소에 들어갔을때는 밤 열한시였으니까. 나중에 자기들이 내손이렇게 잡고 지장을 요렇게.. 종이를 요리. 한사람은 이렇게 내 팔 잡고
(그렇게 부인도 못하고 들어가셨네요..) 그 재판 받으면서도 참 많은 에피소드가 있어 내가 재판을 하면서도 내가 인정을 한것은 한건이 없어 모두 자기들이 만든 범죄행위야 아마 그런 공안사건에 그렇게 한 사건이 없을거야. 그런데도 소용없어 그래도 유죄가 돼 증인이 교도관이 나왔어. 검사가 때리는걸 봤습니다. 발로차는것을 봤습니다. 사형시킨다고 했습니다. 증언해도 소용이 없어요 재판부를 싹 바꿔버려 판사들을 그다음 재판 기일에 나가니까 판사들이 싹 바꿔지고 없어 그래서 재판이고 뭐고 없이 결심, 해가지고 이름도 안잊어버리네. 정광일이라고 부장판사 정광일.
1986년 투옥된 김양기씨는 7년형을 받고 5년이 지나 1991년 출소했다
Q)출소이후에는 어떻게 사셨어요?
간첩죄로 징역을 살고 나온사람을 누가 취직을 시켜줄거야. 내가하던 직업은 이미 공중에 분해되어 버렸고 아무것도 가진게 없고 노동일을 하려고 해도 경찰들이 찾아다니는것때문에 그것도 못해 하다못해 친구들 집이나 아는 지인들집에 내가 들렀다 경찰이 와서 물어보더라는거야 양기 뭐하러왔더냐? 밤1시, 12시, 1시 그때도 전화가오고. 그때만해도 우리 아이들이 전화만 왔다하면 시퍼렇게 질려가지고 아빠또 잡혀가? 기가막힐 노릇아니야. 이거 그러다 보니까 사회에 대한 분노가 왜내가 이런 고통을 겪고 살아야 하는가. 원망과 분노. 그런것들이 한이 가슴에 쌓여서 그러다가 이밭에 와서 집사람이, 우리밭이 있으니 그밭으로 한번 갑시다 여기와서 봄에 콩을 심더라고. 그러니까 며칠 후에 오니까 콩이 그콩이 머리를 들고 솟아나와. 그게 그렇게 신기해 그러니까 그 콩이 잎이되는거야 거기에 싹 나는것을 보고 그런것에 빠져서, 그런것에 마음을 주고.. 여기오면 pd님이 보시다시피 누가 나를 간섭할 사람도 없고, 흉 볼 사람도 없고 나혼자서 여기서 그냥 시간가는줄 모르게.. 만약에 그렇지 않았으면 폐인이 내가 되었거나 이미 죽었을거야 그울분 달랜다고 술이나 마셨을 거고. 술안마셨겠어요? 마시지..
김양기씨는 23년을 싸운 끝에 지난 2009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재심 재판부는 "국가의 존립 근거인 국민에 대하여 그 신체의 자유를 아무런 근거없이 속박하였고, 최후의 인권 수호기관인 법원은 눈과 귀를 막은 채 공허한 증거들이 그려낸 허상만을 바라보았다 엄혹한 시대에서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기에는 피고인의 인권이 침해된 정도가 너무나도 중대하다" 고 판시했다. '김양기 간첩조작사건'은 군부정권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승소한 후에는 나처럼 이렇게 억울하게 간첩으로 조작된 선생님들 찾아다니면서 재심하라고 쫓아다니고, 설득하고 그런 일에 몇년을 그러고 다녔어요.
(만나보니까 주로 어떤분들, 선생님처럼 여순사건에 관련된 분들인가요?) 아니예요 그런사람은 나혼자고 납북어부들이 많고, 고기잡으러 갔다가 자신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북한에 납북됐다가 넘어온 사람들 그런사람들 있고, 또 재일교포들, 일본이 고향이라고 오면 김포에서 딱 잡아서 데리고 가서 간첩만들어 버리고 일본 간첩단 사건, 이런것 전부 무죄 받았잖아요 지금 현재 내가 할때만해도, 내가 법정싸움하고 재심싸움할 때만해도 그런 사람들 밖에 나오지 않았어 믿지를 않고.
(몇년동안 그러셨으면 일상생활, 일하시는..) 일도 못하지 군산에 재판이 있으면 피해자들 가족들 만나러 가서 위로해주고 간첩사건이라고 하는데 누가 방청객이 나와서 그사람들 위로해줄 사람이 누가있겠어 힘내라고 여기서부터 거기 쫓아가고, 부산가고, 서울가고 우리집에 고속버스표가 이렇게 있었어 (선생님 마음에 응어리진것때문에..) 그렇죠 그런 억울한 사람들이 나오면 안되잖아
Q)아직도 한이 남으셨죠?
그 고문을 하고 사건을 조작하고 했던 그런 사람들은 훈장을 받고 20년, 30년 동안 국가의 혜택을 다 받으면서 살아 그러면 그 사람들 그대로 용서를 해야하는가? 그 훈장 받은거 다 압수해야 하고, 취소해야하고 그동안 받았던거 구상권 청구하고 전부다 물어내게 해야하는거 아니야 그렇잖아요 걔들이 그 시절만 해도 전두환이 간첩잡아라, 간첩잡아라 그랬거든 그래 놓으니까 간첩으로 만든거야 그러면 상금주고, 표창장 받고, 훈장받고
이제 한 오십몇명인가, 이십몇명인가 밖에 회수를 못했어요 훈장받은 사람 것은 전부 회수해야하는것 아닌냐 판결이 이렇게 나고, 이렇게 됐으면 그들이 왜 지금도 국가 특혜를 받고 살아야 하냐. 그런문제죠. (그래야 마음이 풀리시는.. )(마음같으면 똑같이..) 나는 고문좀 해보고 싶어. 그사람들 나한테 했던것처럼..
Q)고문 후유증 아직 있으시죠?
저녁에는 잠을 못자지만, 남보기에는 싱싱한것 같이 보여 그런데 몸에는 골병이 들어가고 있어요 비가오면 이런곳은 아리고 그런것은 아프다고 할수가 없죠
췌장도 들어내고 없죠. 나는 쓸개빠진 놈이야 그렇게 웃고살아. 쓸개가 없어서..
Q)앞으로 소원이 있다면?
여순사건이 옛날 과거의 사건이 아니예요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이예요 그렇잖아요 나와 같은 피해자가 생기니까 희생자가 생기니까. 내가 왜 고문을 당하고 여순사건 특별법이 이번에는 틀림없이 통과가 되어서 그분들의 원혼을 좀 달래주고, 추모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면 또, 명예회복을 시켜주었으면.. 그것은 국가적으로 우리가 당한 유족끼리 할것이 아니라 국가가 저지른 죄니까 국가 범죄니까 국가에서 그 사죄를 해야한다고 봐요 그래서 그분들의 그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 늦었지만 남아있는 우리,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렇게 되기를 저는 소원합니다.
제 21대 국회에서는 여순 10.19 특별법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
여수10.19 특별법제정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본 영상은 마포꽃점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0xciSLGPSQ&list=PLHEqzPr4LKU3sthgDAksOCciUJMUQwxB_&index=46
[증인 풀버전] #1 김양기 인터뷰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
저자명 | 여수m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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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연도 | 2020. 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