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설
‘한국의 나폴리’, 또는 ‘수산도시 여수’로 불릴 만큼 여수시는 아름다운 해양 환경과 항만의 도시로 정평이 나 있다. 여수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산물에 대해서는 미국 FDA에서조차 위생과 맛 부분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은데다, 사시사철 생산되는 먹거리 탓에 미식가들의 발길도 꾸준히 늘고 있다.
“여수에서 돈자랑 말라”는 속담 아닌 속담을 낳을 만큼 여수 지역의 수산업은 활기와 더불어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1990년을 전후해 중국 어선들의 마구잡이식 어획과 환경 오염, 그리고 WTO 체결 이후 수입산 해산물이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위기를 딛고 현재는 어장정화사업과 기르는 어업, 어장목장화사업 등을 통해 제2의 수산 부흥기 맞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다.
1970년대 국내 최대의 석유화학산업단지가 조성됨으로써 산업의 중심이 수산업에서 공업으로 다소 변형된 부분도 있지만, 여수 지역은 여전히 수산도시로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여수시가 전라남도 제1의 도시로 명성을 날릴 수 있도록, 그 뿌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여수 수산업의 오늘과 내일을 들여다보자.
- 돌산도
- 돌산도 수협위판장 경매
- 멸치 건조
수산도시로 우뚝 솟다
여수시가 수산도시로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여수 지역 연안에는 조선 말기부터 일본 어선들의 밀어 행위가 빈번했으며, 소수이긴 했지만 일본 어민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었다. 특히 불무섬(현 국동어항단지 건너편에 있는 섬)에는 꽤 많은 일본 어민들이 살고 있었다. 종포, 봉산리에 ‘일제 식민어촌’이 본격적으로 건설된 것은 한일합방 후의 일이다.
이 가운데 종포는 일본의 아이치현[愛知縣] 사람들이 주축이 된 식민어촌이었다. 아이치현에서는 1903년부터 장려금을 보조하며 우리나라 연안에 어선을 출어시켰으며, 수산시험선을 파견하여 적지조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1906년 조사에서 일대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수산시험선을 지휘한 사람은 소천제(小川濟)로, 1906년부터 1913년까지 7년 동안 경상북도(동해)에서 전라북도(서해)까지 연해의 수산조사를 벌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여수 해역 연근해 전역, 그러니까 약 30방리(方里)에 걸쳐 키조개와 피조개 어장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키조개 어장의 발견은 전라남도와 총독부의 깊은 관심과 환영을 받게 되어, 소천제는 1914년 전라남도 교사로 임명되어 여수군에서 근무하게 된다. 키조개는 번식력이 왕성한데다 어장도 워낙 넓어 어떻게 채취하고 가공, 이용해야 하는가가 당시 조선 수산업계의 일대 문제로 부각되었다.
총독부 수산과 역시 키조개 어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기사와 잠수기 어선 2척을 파견하여 키조개 번식 상황을 주기적으로 체크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용 방법과 현지 시험을 위해서 현재의 만성리해수욕장 인근에 사옥을 세워 조사를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과 함께 키조개의 서식지와 어법 등이 소개되고, 마침내 1915년에는 경성박람회에 키조개를 출품하게 되었다.
경성박람회는 시찰자의 왕래가 빈번한 곳인데다 키조개의 명성과 관심이 이미 널리 알려진 터라 여수는 ‘수산보고 여수항’이라는 새로운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산업에 종사하는 일본인 가구는 3호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키조개 어장이 발견된 이후 부산 등지에서 수산업 종사자들이 몰려와 33호, 약 120명으로 늘어나더니, 불과 몇 년 사이 수천 명에 달할 정도로 번성해 갔다. 어획고 역시 갈수록 증가하였다.
당시 1년 매출로 240만 엔(円) 이상을 올렸는데, 이는 통영과 삼천포의 수산업계에서 벌어들인 매출과 맞먹을 정도였다. 그러나 1919년과 1920년 8월에 2년 연속 섬진강이 범람할 정도로 무서운 폭우와 태풍의 영향으로 키조개 어장은 현저히 줄어들었으나 키조개에 대한 연구와 조사, 채취는 계속됐고, 이는 이후 여수수산전문대학(현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또한 꾸준하게 이어진 대일 수출은 수산도시 여수의 명맥을 잇게 해주었다.
여수 수산업을 이끄는 안강망 어선
안강망 어선은 흔히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조기와 갈치, 민어, 병어 등을 잡는 배로서, 여수수산업협동조합과 수산업을 견인하는 수산업종이다. 안강망 어법은 긴 주머니 모양의 통그물을 조류가 빠른 곳에 큰 닻으로 고정한 뒤 조류에 밀려 내려오는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여수 수산업의 중흥기인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 같은 안강망 어선이 180여 척 정도 될 정도였고, 당시 전국 70%의 쥐치어(쥐포)를 여수에서 생산했을 만큼 활황이었다.
1척당 2백여 톤 규모인 안강망 어선은 10~12명의 선원이 승선하며, 제주도나 추자도 등지의 연근해에서 조업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중국 동진아 해역에서 조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1항차는 보름 주기로 1개월에 두 번 입항과 출항을 반복하며, 1항차당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에 가까운 어획고를 올렸으니, 안강망 어업이 여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만하다. “여수에서 돈자랑 말라”는 말이 나온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선주는 웬만한 중소기업보다 높은 매출을 올렸으며, 180여 척의 안강망 어선에서 일하는 4천여 명의 선원 외에도 어구와 고기상자를 만드는 산업 역시 발달했기 때문에 직접·간접 고용 효과는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선원들이 부족하여 중국이나 동남아 등에서 온 160여 명의 외국인 선원이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면서 WTO 출범과 한·중 어업협정, 연근해 오염 등의 악재가 겹쳤다. 또한 어장 황폐화에 못지않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 유가 폭등과 부족한 선원수였다. 결국 1999년 정부의 감척사업이 추진되었고, 안강망 어선수는 1년 만에 60여 척 정도가 감척 대상 신청을 하였다. 이후 10여 년이 흐른 현재, 여수 안강망 어선은 40여 척만이 남아 조업하고 있으며, 원해가 아닌 연근해에서 어획하고 있다. 다행히 정부의 어장보호사업에 힘입어 연근해에서도 적지 않은 어획고를 올리며 옛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 여수수산업협동조합
- 연도수도
- 잠수기수산업협동조합
수산도시의 명성을 잇는 기선권현망 어업
멸치는 청정 해역에 걸맞게 반도를 휘감은 가막만과 여자만, 돌산도뿐만 아니라 소리도(일명 연도)와 거문도, 멀게는 청산도와 완도 해역에서 고르게 분포하는 어업 자원이다. 멸치잡이의 경우 20여 가지의 어법이 소개되고 있지만, 많은 어획량과 함께 활성화된 어법은 선단을 이루어 조업하는 권현망 어업이다.
권현망 어업은 보통 2척의 끌배와 1척의 어탐선, 1척의 기공선. 2~3척의 보조선 등 6척으로 1선단을 이루는데 이를 보통 1통이라 일컫는다. 여수의 경우 1991년 선인망협회로 법인화된 이후 현재 16통이 조업 중인데, 1선단에는 40~45명의 선원이 조업을 하고 있다. 바다에서 잡은 멸치는 곧바로 선상 위에서 삶아 건조장까지 옮기는데, 이 같은 건조장에는 20여 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1선단당 크고 작은 건조장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 이들 1선단의 연간 어획고는 평균 30억 원 안팎으로, 수온이 20~22도를 유지하는 7~8월 최성어기를 맞이하며 산란기인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의 금어기를 제외하고 연중 생산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해마다 어획량의 차이는 발생하지만 꾸준한 어획고를 올리고 있는데, 이렇게 어획량이 많은 탓에 경상남도 지역의 대형 선박들이 조업 구역을 침범하여 법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게 먹이사슬의 기본인 멸치 작황이 해마다 풍작을 이루면서 여수 바다는 말 그대로 수산의 보고로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여수 지역 양식 산업은 1967년 여수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장 부지에 삶터를 내준 이주민의 대부분이 원래 어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가막만에서 홍합양식을 시작했다. 홍합의 경우 다른 품종에 비해 양식이 용이하고 성장이 빠른 특징을 보여서였다. 1970년대로 들어서며 양식어장의 면적은 점차 늘어났는데, 가끔은 기존의 굴양식장이 집단 폐사하면 홍합의 과밀식에 의한 오염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굴양식 어민들이 항의하여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수 지역 홍합은 청정 해역에서 생산된 탓에 홍합의 독소 파문에도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는 등 그 값어치를 인정받아 판로가 점차 확대됐으며, 어장의 면적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수 지역 양식 산업은 크게 어류와 패류로 나눌 수 있다. 가막만 근해의 경우 굴과 홍합양식이 주를 이루고, 바지락과 꼬막·전복 양식어가도 적지 않다. 또 해상 가두리 활어양식장도 300㏊에 걸쳐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수산 양식 분야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던 2000년을 기준으로 양식산업 세대수는 3,300여 가구로, 1990년의 1,900여 세대보다 배에 가까울 정도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품종도 다양화되었다. 1990년에는 어업기술뿐만 아니라 양식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하여 우럭과 광어·농어 등 보편화된 어종에 국한됐으며, 패류도 굴과 홍합 등 기존 양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2000년대로 들어서며 양식 품종의 각종 신기술이 보급되면서 대단위는 아니지만 다양한 양식산업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여수 지역의 경우 2007년 말을 기준으로 미역(23㏊)과 다시마(178㏊)·파래(5㏊)·참모자반(2㏊) 등 해조류뿐만 아니라, 피조개(930.58㏊)·바지락(130.8㏊)·꼬막(29㏊)·새꼬막(3,465㏊)·홍합(320㏊)·가리비(6㏊)·전복(70㏊) 등 다양한 품종이 생산되고 있다. 어류도 235㏊에 걸쳐 70건이 양식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감성돔과 참돔, 돌돔 등 돔 종류를 위주로 한 고급 어종을 생산하는 어가가 늘고 있는 추세이다. 이외에도 멍게(34㏊)와 미더덕(3㏊)이 양식되는 등 품종의 다양화도 진행되고 있다.
여수 양식어가는 전국 양식어가의 10%, 전라남도 지방의 30%를 차지할 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여수 지역 수산업이 질과 양적인 면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가와 원자재(사료) 가격이 폭등한데다, 밀식에 의한 과잉 생산과 수입산의 범람으로 가격이 하락하여 어민들의 시름을 더하고 있다.
자연산 이름값 하는 연근해 어업
여수시가 수산도시로 위상을 더하는 데는 수치화되지 않은 연근해 어업이 활성화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2006년 말을 기준으로 여수시가 보유하고 있는 어선 수는 동력선이 6,156척, 무동력선이 225척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 가운데 소형 선박인 5톤 미만의 선박이 전체 80%가 넘는 5,141척을 차지해 연안 어업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연안 어업은 생활권내에서 생계수단으로서 생산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연근해 수산자원이 줄면서 최근에는 마을단위로 공동어장을 형성하여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이들은 계절별로 참장어나 꽃게, 개불, 문어, 낙지, 쭈꾸미 등과 낚시어업을 통한 자연산 활어 등 다양한 수산물을 생산하며, 시장이나 단위 수협에서 직접 위판하는 바람에 정확한 통계를 내는 것이 쉽지 않다.
1995년 소리도 인근 해역에서 발생한 씨프린스호 해양기름유출사고 당시 보상에 애를 먹었던 이유도 이들의 통계가 자료화되지 않아 피해액을 산출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생산하는 수산물 대부분은 맛이나 신선도뿐만 아니라 자연산이라는 점 때문에 미식가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최근에는 유료낚시터나 체험어장 등 테마관광 상품을 만들어 수산과 관광을 접목시키는 어가가 늘고 있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참고문헌
- 『개교70년사 여수수산대학』 (여수수산대학개교70년사편찬위원회, 1987)
- 『여수 중장기종합발전계획』 (여수시, 2001)
- 『통계연보』 (여수시, 1986)
- 『통계연보』 (여수시,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