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0주년 특집 5부작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2부
- 날짜
- 2021.10.13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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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
- 등록자
- 윤성현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있는 눈물
우리마을은 그날이후로 추석명절이 없어졌습니다.
2부 추석없는 마을
(전남순천시 낙안면 신전마을)
장홍석 여순사건 당시 2세 - 1949년도 그때는 농사만 알고 형제간처럼 아주 오순도순 살기좋은 마을이였어요 그러던 차에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밤만되면 반란군들이 와서(산에서 내려와 집안에) 식량이 있으면 있는대로 다 털어가고..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시작되었고 여수는 10월 27일, 진압군이 완전히 점령합니다. 그런데 10월 27일에 여순사건이 끝난것은 아닙니다 .여순사건은 (발발이듬해인)1949년 내내 지속이 됩니다. 왜냐하면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 등지로 입산을 했고 거기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게 되고 이에따라 진압군은 토벌작전을 계속 진행하게 됩니다.
(1949년 추석 이튿날 신전마을 비극의 밤 1949년 추석 이튿날 빨치산(반군)이 데려온 부상당한 소년을 챙겼다는 이유로 순천 신전마을 주민들은 이자리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저는 그때 3살이었는데 형수등에 업혀 죄인 줄에 앉혀졌습니다. 형수는 젊고 하니까 앉아서 자꾸 나오면은 몇번을 그렇게 해가지고 다시가고 다시오고 해서 결국에는 죽지않고 겨우 오고.. (죄인줄에서 벗어나기위해 안간힘을 쓴 형수 젊은 형수의 기지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세사람) 그때 조카가 형수 뱃속에 있었는데 세사람이 산겁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대로 다 있고.. (어머니는 끝내 그죽음의 줄을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등에 업힌 세살 아이부터 60대 노인까지 그들은 소년에게 올벼쌀을 주거나, 홍시를 건넨사람들 영문도 모른채 죄인이 된 22명의 마을주민이 끌려간 곳은 늘 지나치던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이웃집 마당 진압군의 총부리는 무고한 22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총성이 멈춘 비극의 현장... (총을 맞고 쓰러진)사람들에게 기름을 뿌리고 다 화장을 시키는 거예요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버린 망자들) 자기 가족인데도 알아볼 수가 없어서.. 비녀 랄지 가락지 랄지 몸의 특징들을 봐서 우리어머니는 비녀를 보고 찾았다고 해요 너무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 군인들 가운데서도 걱정을 많이 하더라는 거예요 (진압군조차 두려움에 떨게 한 신전마을의 비극) 큰일났다고 자기들끼리.. 그래놓고는 일부군인들은 그도 모자라서 집 있는대로 천하에 다 불을 놓고 다녔어요 (온 마을을 불바다로 만든 일부군인들) 그때 우리마을은 지금도 빈 터만 남았어요(마을은 잿더미가 되고 마을사람들은 한순간에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옷가지며 식량이며 모든것이 하룻저녁에 가족이며 다 잃었어요 그게 남아있는 가족들 남아있는 마을분들이 입이있어도 말을 못하고 혼이나갔어요( 피붙이의 처참한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해야했던 현실)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했기때문에 사람이 혼이나가.. 집이있어 먹을것이 있어.. 시체들을 땅에다 묻어야 되는데 다 불을 태웠으니 그 묻을 삽 괭이 이런것마저 없어져서(마을에는 무덤을 팔 삽하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연장을 빌리고 인부를 사고 마을사람들이 혼이 나가버렸기 때문에(거짓말 같은 현실앞에 넋이 나간 마을사람들) 그 피해를 안본사람들이라도 할수있는게 없어서 그래서 이웃마을에 가서 인부가 오고.. (집 마당엔 22명의 피가 낭자했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사람을 태웠으니 그 피비린내, 사람탄냄새가 (온마을은 죽음의 냄새로 뒤덮였다) 어떻게 코에 역겨웠던지 이 마을앞에 코를 들고 다니기가 힘들정도로... (그후 마을에선)빨갱이에 빨자 순사에 순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고..
김득중 국사편천위원회 편사연구관 - (희생된 사람들이)빨갱이 였기때문에 죽인것이 아니라 죽인다음에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죠
한홍구 역사학자 / 성공회대교수 -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순간 우리사회에서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는거죠 빨갱이 가족이라고 하면 입 다물고 살았어야 했고 연좌제라든가, 신원조회라든가 그런게 (그동안 우리사회에서)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까
한글도 깨우치지 못하고,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들이 빨갱이가 뭔지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뭘알겠습니까 우리마을은 그때부터 추석이 없어졌습니다. 한집 건너 한집이 제삿집이였고..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추석이 되어버렸어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갔다)
신전마을 주민이었던 홍동호씨는 저보다 네살이 위입니다. 위인데 그분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 동생이 겨우 3살이였는데 4명을 잃어버리고 7살에 혼자남았어요
(한순간에 고아가 된 소년) 거지생활을 했어요 밥얻어먹다가 조금 크니까 쓰레기 줍는 넝마지.. 청년기때에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내가 뭣을 보고 사냐 세번을 자살기도 했는데 곧 죽을 순간에 등산객이 구해주고 살았어요.. 좀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해서 몸이 망가져서 아파서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마을을 떠났던 홍동호씨는 지난해 고인이 되셨다)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젊은이들이 취업이 안되요 중동에 취업은 안되는데 월남전 파병은 선뜻 받아주는걸 보면서 유족들이 '중동에는 돈벌러가는곳이라 (안됐고) 월남전은 죽으러 갈수도 있는 자리니 허용해준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유족들의 아픔과 애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족들 대부분이 못입고 못배우고 못먹는 3무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는 비참한 상황들에 처해지게 됐습니다.
(신전마을 초입에 방치된 여순사건 표지판처럼 점점 잊혀져가는 그날의 기억 하지만 장홍석씨에겐 어머니를 떠올리게하는 단 하나의 흔적이다. )
우선 많이 보고싶었다고 얘기하고 싶고요.. 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비명에 가신 나의 어머니... 지금 민주화가 된 이땅에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정부가 있다고 하는데도 그런 사건을 지금도 외면을 하고(여순사건의 실체가 외면당하는 뼈아픈 현실...) 나몰라라 하고 그런 것들을 우리 자식들이 우리 이웃들이(자식으로서.. 그아픔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거 하나 지금까지 해결하지도 못하고 이런 긴긴 세월을 보내는 것이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 mbc홈페이지 시청자의견 게시판 / 여수mbc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 바랍니다.
부용산 -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윤선애 노래 / 요절한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은 슬픔을 표현한 시에 곡을 붙임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하여 금지곡으로 취급받은 노래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시든 장미는 흙으로 돌아갔네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기획 김지홍 / 구성 이혜련, 정안형 / 카메라 송정혁, 최재훈, 신대호 /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장대은
운전 김득중, 옥지수 / 음악 이수환 /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자료협조 제주MBC
타이틀그래픽 최윤정 /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연출 이동신
제작 여수mbc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2부 추석없는 마을
우리마을은 그날이후로 추석명절이 없어졌습니다.
2부 추석없는 마을
(전남순천시 낙안면 신전마을)
장홍석 여순사건 당시 2세 - 1949년도 그때는 농사만 알고 형제간처럼 아주 오순도순 살기좋은 마을이였어요 그러던 차에 여순사건이 발발하고 밤만되면 반란군들이 와서(산에서 내려와 집안에) 식량이 있으면 있는대로 다 털어가고..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시작되었고 여수는 10월 27일, 진압군이 완전히 점령합니다. 그런데 10월 27일에 여순사건이 끝난것은 아닙니다 .여순사건은 (발발이듬해인)1949년 내내 지속이 됩니다. 왜냐하면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 등지로 입산을 했고 거기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게 되고 이에따라 진압군은 토벌작전을 계속 진행하게 됩니다.
(1949년 추석 이튿날 신전마을 비극의 밤 1949년 추석 이튿날 빨치산(반군)이 데려온 부상당한 소년을 챙겼다는 이유로 순천 신전마을 주민들은 이자리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저는 그때 3살이었는데 형수등에 업혀 죄인 줄에 앉혀졌습니다. 형수는 젊고 하니까 앉아서 자꾸 나오면은 몇번을 그렇게 해가지고 다시가고 다시오고 해서 결국에는 죽지않고 겨우 오고.. (죄인줄에서 벗어나기위해 안간힘을 쓴 형수 젊은 형수의 기지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세사람) 그때 조카가 형수 뱃속에 있었는데 세사람이 산겁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대로 다 있고.. (어머니는 끝내 그죽음의 줄을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등에 업힌 세살 아이부터 60대 노인까지 그들은 소년에게 올벼쌀을 주거나, 홍시를 건넨사람들 영문도 모른채 죄인이 된 22명의 마을주민이 끌려간 곳은 늘 지나치던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이웃집 마당 진압군의 총부리는 무고한 22명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총성이 멈춘 비극의 현장... (총을 맞고 쓰러진)사람들에게 기름을 뿌리고 다 화장을 시키는 거예요
(형체를 알아볼수 없을 정도로 훼손돼버린 망자들) 자기 가족인데도 알아볼 수가 없어서.. 비녀 랄지 가락지 랄지 몸의 특징들을 봐서 우리어머니는 비녀를 보고 찾았다고 해요 너무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 군인들 가운데서도 걱정을 많이 하더라는 거예요 (진압군조차 두려움에 떨게 한 신전마을의 비극) 큰일났다고 자기들끼리.. 그래놓고는 일부군인들은 그도 모자라서 집 있는대로 천하에 다 불을 놓고 다녔어요 (온 마을을 불바다로 만든 일부군인들) 그때 우리마을은 지금도 빈 터만 남았어요(마을은 잿더미가 되고 마을사람들은 한순간에 빈털털이가 되고 말았다) 옷가지며 식량이며 모든것이 하룻저녁에 가족이며 다 잃었어요 그게 남아있는 가족들 남아있는 마을분들이 입이있어도 말을 못하고 혼이나갔어요( 피붙이의 처참한 죽음을 바로 눈앞에서 목도해야했던 현실)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했기때문에 사람이 혼이나가.. 집이있어 먹을것이 있어.. 시체들을 땅에다 묻어야 되는데 다 불을 태웠으니 그 묻을 삽 괭이 이런것마저 없어져서(마을에는 무덤을 팔 삽하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연장을 빌리고 인부를 사고 마을사람들이 혼이 나가버렸기 때문에(거짓말 같은 현실앞에 넋이 나간 마을사람들) 그 피해를 안본사람들이라도 할수있는게 없어서 그래서 이웃마을에 가서 인부가 오고.. (집 마당엔 22명의 피가 낭자했고)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사람을 태웠으니 그 피비린내, 사람탄냄새가 (온마을은 죽음의 냄새로 뒤덮였다) 어떻게 코에 역겨웠던지 이 마을앞에 코를 들고 다니기가 힘들정도로... (그후 마을에선)빨갱이에 빨자 순사에 순자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고..
김득중 국사편천위원회 편사연구관 - (희생된 사람들이)빨갱이 였기때문에 죽인것이 아니라 죽인다음에 그들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죠
한홍구 역사학자 / 성공회대교수 -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힌순간 우리사회에서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는거죠 빨갱이 가족이라고 하면 입 다물고 살았어야 했고 연좌제라든가, 신원조회라든가 그런게 (그동안 우리사회에서)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까
한글도 깨우치지 못하고,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분들이 빨갱이가 뭔지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뭘알겠습니까 우리마을은 그때부터 추석이 없어졌습니다. 한집 건너 한집이 제삿집이였고.. 집집마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추석이 되어버렸어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마을을 떠나갔다)
신전마을 주민이었던 홍동호씨는 저보다 네살이 위입니다. 위인데 그분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동생.. 동생이 겨우 3살이였는데 4명을 잃어버리고 7살에 혼자남았어요
(한순간에 고아가 된 소년) 거지생활을 했어요 밥얻어먹다가 조금 크니까 쓰레기 줍는 넝마지.. 청년기때에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내가 뭣을 보고 사냐 세번을 자살기도 했는데 곧 죽을 순간에 등산객이 구해주고 살았어요.. 좀 남들처럼 살아보려고 갖은 고생을 다 해서 몸이 망가져서 아파서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혈혈단신으로 마을을 떠났던 홍동호씨는 지난해 고인이 되셨다)
이영일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소장 - 젊은이들이 취업이 안되요 중동에 취업은 안되는데 월남전 파병은 선뜻 받아주는걸 보면서 유족들이 '중동에는 돈벌러가는곳이라 (안됐고) 월남전은 죽으러 갈수도 있는 자리니 허용해준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유족들의 아픔과 애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족들 대부분이 못입고 못배우고 못먹는 3무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로 전락하는 비참한 상황들에 처해지게 됐습니다.
(신전마을 초입에 방치된 여순사건 표지판처럼 점점 잊혀져가는 그날의 기억 하지만 장홍석씨에겐 어머니를 떠올리게하는 단 하나의 흔적이다. )
우선 많이 보고싶었다고 얘기하고 싶고요.. 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억울한 누명으로 비명에 가신 나의 어머니... 지금 민주화가 된 이땅에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정부가 있다고 하는데도 그런 사건을 지금도 외면을 하고(여순사건의 실체가 외면당하는 뼈아픈 현실...) 나몰라라 하고 그런 것들을 우리 자식들이 우리 이웃들이(자식으로서.. 그아픔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거 하나 지금까지 해결하지도 못하고 이런 긴긴 세월을 보내는 것이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여순사건에 대한 의견과 피해사례 제보, 본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소감을 보내주시면 향후 제작에 반영하겠습니다 .여수 mbc홈페이지 시청자의견 게시판 / 여수mbc페이스북으로 많은 참여 바랍니다.
부용산 - 박기동 작사, 안성현 작곡, 윤선애 노래 / 요절한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은 슬픔을 표현한 시에 곡을 붙임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하여 금지곡으로 취급받은 노래
부용산 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시든 장미는 흙으로 돌아갔네
제작지원 gs칼텍스, LG화학, LOTTE ADVANCED MATERIALS
기획 김지홍 / 구성 이혜련, 정안형 / 카메라 송정혁, 최재훈, 신대호 / 오디오 양원석, 임솔빛, 장대은
운전 김득중, 옥지수 / 음악 이수환 / 사진 고 이경모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 자료협조 제주MBC
타이틀그래픽 최윤정 / 행정 문은호, 신진영, 이가영
연출 이동신
제작 여수mbc
1948.10.19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 가려진 시간, 고여 있는 눈물 2부 추석없는 마을
https://www.youtube.com/watch?v=3kzgSGPbvE0
[여순사건 70주기 특별기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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