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특별기획 증인] #4 강질용 인터뷰
- 날짜
- 2021.12.16 11:01
- 조회수
- 387
- 등록자
- 윤성현
여수10.19 특별법 제정 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네번째 증인 강질용 순천낙안 신전마을 희생자 유족
Q) 그날은 어땠나요?
49년 음역으로 8월 열이렛날 저녁 10시가 넘어서라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12시전 일찍자는 사람들은 잘 정도. 그런 시각에
갑자기 총성이 울리면서 동네분들을 군인들이 전부 전부 경찰 아니고 순수한 군인들. 14연대 소속이었다고 그래요
군인들이 이 마을 주변을 전부 에워싸고 총성을 울리면서 집합을 싹 시킨거예요.
집합을 어떻게 했냐면, 신작로 저쪽에 그 이유가 뭐 때문에, 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와서 집합을 시켰냐면
문홍주라는 그때 당시 11살 먹은 사촌 큰집 형님이랑 같은 또래. 그때당시 사건당시 11살 먹은(아이가)
반란군 연락병을 하다가 총살을 입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다리를 다쳐서 반란군이 와서 그때당시 마을 이장집에 맡겨서 당신들이 이 아이를 아무런 사고없이 잘 치료해서 책임지고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서 안할수는 없고 갸를 이장집에 데려다 놓고 밥도주고 뭣도주고 그러다보니까 치료도 됐겠죠 큰부상이 아니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불쌍하다고 이웃사람들 이곳저곳에서 옷도주기도 하고 가을철이 되고 그러면 과일, 감같은것도 주고 이랬어요
그런데 걔가 자기 할아버지 조부가 그때 당시 쌍암에, 쌍암면 소재지에서 약국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주 왔다갔다 했는데 가는 도중에 이야기도 하고 승주 남강마을 앞에서 시비가, 싸움이 벌어져서.. 우리 친구를 데리고 와서 너희들 가만히 안둔다 이런식으로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지나가던 분이 누구였냐면 그때당시 쌍암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얘기가 말하는것이 상당히 이상하다 생학해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반란군의 소속이구나 연락병이구나 해서 경찰서에 연락을 해서 걔를 체포를 하고 그 얼마후에 군인들이 걔를 데리고 온거예요
군인들이 다 소집을 해놓고 죄있는 사람들만, 죄있는 사람들은 실제 반란군들은 전부 도망가버리고 있겠습니까?
이제 죄없는 사람만. 애기 밥한그릇주고 뭐 음식좀 줬다고 해서 죄라고 생각도 안해봤죠.
그런데 싹 소집을 해서 그렇게 내가 뭐때문에 이쪽이냐. 누가 뭐 줬습니다. 자진해서 말한 사람, 주민은 없었겠죠 군인들이 누가누가 줬어 (물어보니까)
(그아이가)손가락질 하면서 저사람은 밥주고, 저사람은 빨래빨아주고.. 발로 톡톡 쳐버리면서 그런 사람을 색출해내서 한쪽으로 구분하는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죽이려고 하는지 생각을 안했죠 거기서도 좀 의심을,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해서 빠져나온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고랑 저쪽으로 들어가서 산사람도있고 그렇다고 하는데...
그날 마을사람 22명이 총상됐다. 그중에는 4살이 채 안된 어린아이도 3명이나 있었고 67살 되는 노인도 있었다
뭔 법이 그런 무법이 있었을까요. 살인을 시켜도 재판을 하고 심문을 하고 조서를 받아서 사형을 시켜야지, 죄의 댓가를 무조건 손가락질 하나로 해서 주민들을 학살시키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 애들 장난도 아니고 미개국에서도 그런일이 없었을 거예요.
Q) 마을에 불도 질렀죠?
유일하게 이쪽은 외따로 떨어져서 그랬는지 집이 좀 안좋아서 허술하고 적었어요. 우리가 최근에도 이집 한채만 놔두고 나머지는 전부 전소시켜서 불내서 전부 전소가 되어버렸어요 이집 한채만 남고. 빼내지도 못하고. 옷같은건 입을 것 그런거 하나정도만 빼냈다고 그래요
사건 당시 강질용씨는 고작 100일된 갓난아이였다.
온 마을이 불타는 바람에 아버지 사진 한장도 건질 수 없었고 강질용씨는 한평생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살아야 했다.
Q) 아버님 얼굴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사진도 안남고..
사진도 안남고, 그러니까 너무 한스럽고 그래요. 돌아가신 뒤라도 어떻게 돌아가시든지 간에 얼굴이라도 얼굴도 볼수가 없는 그런 나이기 때문에
사진이라도 봤으면, 이렇게 생겼구나 어버지가 할텐데.. 너무 그게 참 한스럽습니다. 사진한장도 없이 이렇게 남김없이 되어버린것이..
사진은 있었겠지만 불에 타서 전소를 해버렸기 때문에 다 타버린 것이죠.
Q) 마을사람들은 다 타버렸으면 어디가서..
전부 집도 태워버리고 부모 형제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들 친척집이나 친척이 없는 사람은 아는 지인들 집으로나 그렇게 다 피난을 갔었다 그래요
우리집 같은 경우는 숙부님이 작은 아버지가 같은면에 내동마을이라고 거기서 약 1년간 정도
집을 새로 짓기 전까지는 우리같은 경우는 그렇게 살고. 남들도 다 친척집에서 그렇게 살았다고 그럽니다. 인근마을로 가기도 하고
제일가까운 금산마을이라고 그쪽에도 여러사람들이 작은방에서 세 얻어서 들어가듯이 살았습니다.
아궁이 하나 받치고 밥만 어떻게 해먹고 잠만자고 그럴 정도였죠 뭐
Q) 가족중에 또 희생되신 분이 있나요?
우리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큰어머니, 이마을에 큰집하고 우리 집 가운데고, 막내 작은 아버지는 낙안쪽에 계셨어요
그때 당시 분가를 해서 계셨으면 거기도 전부 사형당하고 그랬겠죠 다행히 없어서 그렇지.. 큰아버지, 큰어머니 두분다 또, 그때 당시 11살먹은 사촌누나,
그리고 고숙, 아버지 형제 그때당시 그분이 마을 이장을 했대요. 그래서 고문깨나 하고, 실토를 안하고 뭐 한것이 없는데..
그래서 물에다 쳐넣고 그때 이야기 어머니 얘기들어보면.. 그래도 안한것을 했다고 억지로 말할 수 없잖아요 결국은 고문을 당하니까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 죽어가고 그러니까.. 실토할 일은 없죠 밥해주고 그런일 밖에 없으니까.. 제일 피해가 많아요 우리집안이..
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촌누나, 고숙, 우리아버지..
Q) 추석이 추석답지 않았겠어요?
추석명절은 명절이라도 항시 슬픔에 젖어있죠.. 제사가 거의 우리어렸기 때문에, 지금은 70년이 넘었기때문에..
그때 당시만 해도 추석이 돌아와도 그렇게 명절이라는 그런 즐거운 마음도 사실없고, 우리마을은...
슬픔 속에 과거를 회상해 보면 그랬죠.. 추석답지 않게 명절이 지나가고 그랬어요
Q) 유년시절은 어떠셨어요?
나는 6월 7일에 음력으로 출생을 했고, 음력으로 8월 열이렛날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 음력 윤달이 7월에 들었다고 해요. 한 백여일 남짓, 그정도일 때죠. 내가 대여섯살
철이 좀 들때부터 아버지는 어디가서 있냐고 어머니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내 위로 누나가 둘 있어요. 그때 당시 그러니까 기억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백여일 남짓인데
학교들어가면서 어머니한테, 누나들한테 아버지 어디 있냐고 그러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어렸을때는 말해봤자 잘 모르기때문에 철이 들어서 주위사람들, 동네사람들, 어머니 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그런 사변이 일어났구나 생각했죠.
우리어머니도 고생많이 했고.. 저도 진학도, 배우고 싶은데 학교도 못가고 초등학교만 나와서 중학교를 친구들이 동네에서 가면 그렇게 부럽고 배우고 싶고 했지만..
어디 객지를 나갈수도 내가 가장이 되어버린것 아닙니까 누나들은 일찍시집가버리고.. 오로지 내가 농사를 지어줘야죠
Q) 아버님은 어떤분이셨어요?
주민들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 아버지께서 그렇게 부지런하셨다네요. 자기일은 밤으로나 언제로 다 해버리고 주민들 일이나 이런것은 발 벗고 나서고 그리고
그때 당시만 해도 새밑고랑 내고 그런거 전부 아버지 혼자 다해버리고. 그렇게 부지런했다고 해요
학교다니면서도 아버지가 계셨으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있겠냐.. 농사짓고 살겠냐 아버지 주민들 이야기를 들었을때도 그렇게 근면했으면 살림을 모으고..
얼마나 많이 벌었겠어요
우리마을에서 같은해 출생자가 9명이나돼요 그런데 공직자로 있는 사람들이 우리동네에서 5명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곳으로 이주를 해버렸고
그런데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생존해계셨더라면 내가 너희들처럼(되었을텐데..) 그런게 너무 한스럽고 그러죠
저런사람들 저런친구들은 부모덕을 보고 부모가 생존해계서서 그런 사건을 안당하니까 진학을 하고, 우리처럼, 나처럼 고생도 안하고..
고생하는것을 자신을 원망해보고 그런적은 없었지만 내복이 그만큼인가보다 생각을 하고..
Q) 마을사람들, 그동안 많이 떠났죠?
많이 떠났죠.. 여기 지금 피해보신 분들만 하더라도 한 20여가구 이상이 떠났죠
Q) 45호 정도가 있었는데 그중에 20여가구가 떠나버린거예요?
사변당시 바로 그해. 바로그때부터 가버린 사람들이 있고 가족이 없어져 버리니까..
지금 현재 우리주민등록상으로는 27세대로 되어있는데 실제로 여기서부터 사변 난 전에 여기 생존해 계신분들은 15호도 못됩니다.
(절반도 안된..) 네 절반도 안되죠 (돌아가셔버리고 없고... 그럼 마을에 한 3분의 2가 떠나버렸다는 말씀이시죠 ) 네
돌아가셔버리고 없고 아들딸들은 객지에서.. 여기는 고향이 없어져 버리죠.
Q) 그럼 이쪽분들 중에는 몇분이나 남아계세요?
고향이라고만 하지 유족으로는 다섯세대 남아있어요 부모 형제를 잃어버리고 여기가 뭐 좋아서 농토나 터전이나 많고 그러면 살아질지도 모르는데 전망이 없기때문에..
Q) 처형장에 학교를 지었네요?
56년도에 이 학교가 건립이 됐어요. 그전에는 여기가 전부 논이었는데 우리 지역민들이 농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우리 어머니부터 한 300평이상 기증해서 여러사람들이 기증을 해서 지역을 위해서 학교를 이쪽에 유치해야겠다 이설을 해야겠다고.. 봉사심이 좋은 분들이 자기논을 내놓으면서 (학교를 지었죠)
강질용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지난 과거사 위원회 조사를 통해 민사보상을 받았다
Q) 한이 좀 풀리셨나요?
저번 과거사위원회 판결난 것 가지고 난 보상이야.. 뭐 만족하겠습니까 얼마를 달라 그렇지는 않겠지만 보상도 미비해요
그동안에 고통받고, 못배우고 혼자 가장노릇 하다시피하면서 살아온 이 과정이 70년간을 그렇게 살아온 것이 뭣이 그거가지고 만족할게 있습니까
앞으로라도 우선은 명예획복은 되어야 하고 특별법이 제정되어서 정말 국가에서 위령 공원도 세워주고, 여기 주민들은 죄없이 국가 잘못으로 이렇게 사살시켰다 대통령이 사과해야죠. 우리 유족들 한테 정말로 잘못한 것을 유족들한테 (사과)해주고 명예회복도 (해주고..)
제21대 국회에서는 여순 10.19특별법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
여수10.19 특별법제정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본 영상은 마포꽃점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네번째 증인 강질용 순천낙안 신전마을 희생자 유족
Q) 그날은 어땠나요?
49년 음역으로 8월 열이렛날 저녁 10시가 넘어서라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12시전 일찍자는 사람들은 잘 정도. 그런 시각에
갑자기 총성이 울리면서 동네분들을 군인들이 전부 전부 경찰 아니고 순수한 군인들. 14연대 소속이었다고 그래요
군인들이 이 마을 주변을 전부 에워싸고 총성을 울리면서 집합을 싹 시킨거예요.
집합을 어떻게 했냐면, 신작로 저쪽에 그 이유가 뭐 때문에, 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와서 집합을 시켰냐면
문홍주라는 그때 당시 11살 먹은 사촌 큰집 형님이랑 같은 또래. 그때당시 사건당시 11살 먹은(아이가)
반란군 연락병을 하다가 총살을 입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다리를 다쳐서 반란군이 와서 그때당시 마을 이장집에 맡겨서 당신들이 이 아이를 아무런 사고없이 잘 치료해서 책임지고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서 안할수는 없고 갸를 이장집에 데려다 놓고 밥도주고 뭣도주고 그러다보니까 치료도 됐겠죠 큰부상이 아니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불쌍하다고 이웃사람들 이곳저곳에서 옷도주기도 하고 가을철이 되고 그러면 과일, 감같은것도 주고 이랬어요
그런데 걔가 자기 할아버지 조부가 그때 당시 쌍암에, 쌍암면 소재지에서 약국을 하고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주 왔다갔다 했는데 가는 도중에 이야기도 하고 승주 남강마을 앞에서 시비가, 싸움이 벌어져서.. 우리 친구를 데리고 와서 너희들 가만히 안둔다 이런식으로 얘기했어요
그러니까 지나가던 분이 누구였냐면 그때당시 쌍암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얘기가 말하는것이 상당히 이상하다 생학해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반란군의 소속이구나 연락병이구나 해서 경찰서에 연락을 해서 걔를 체포를 하고 그 얼마후에 군인들이 걔를 데리고 온거예요
군인들이 다 소집을 해놓고 죄있는 사람들만, 죄있는 사람들은 실제 반란군들은 전부 도망가버리고 있겠습니까?
이제 죄없는 사람만. 애기 밥한그릇주고 뭐 음식좀 줬다고 해서 죄라고 생각도 안해봤죠.
그런데 싹 소집을 해서 그렇게 내가 뭐때문에 이쪽이냐. 누가 뭐 줬습니다. 자진해서 말한 사람, 주민은 없었겠죠 군인들이 누가누가 줬어 (물어보니까)
(그아이가)손가락질 하면서 저사람은 밥주고, 저사람은 빨래빨아주고.. 발로 톡톡 쳐버리면서 그런 사람을 색출해내서 한쪽으로 구분하는거예요
그때까지만 해도 죽이려고 하는지 생각을 안했죠 거기서도 좀 의심을,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해서 빠져나온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고랑 저쪽으로 들어가서 산사람도있고 그렇다고 하는데...
그날 마을사람 22명이 총상됐다. 그중에는 4살이 채 안된 어린아이도 3명이나 있었고 67살 되는 노인도 있었다
뭔 법이 그런 무법이 있었을까요. 살인을 시켜도 재판을 하고 심문을 하고 조서를 받아서 사형을 시켜야지, 죄의 댓가를 무조건 손가락질 하나로 해서 주민들을 학살시키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 애들 장난도 아니고 미개국에서도 그런일이 없었을 거예요.
Q) 마을에 불도 질렀죠?
유일하게 이쪽은 외따로 떨어져서 그랬는지 집이 좀 안좋아서 허술하고 적었어요. 우리가 최근에도 이집 한채만 놔두고 나머지는 전부 전소시켜서 불내서 전부 전소가 되어버렸어요 이집 한채만 남고. 빼내지도 못하고. 옷같은건 입을 것 그런거 하나정도만 빼냈다고 그래요
사건 당시 강질용씨는 고작 100일된 갓난아이였다.
온 마을이 불타는 바람에 아버지 사진 한장도 건질 수 없었고 강질용씨는 한평생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고 살아야 했다.
Q) 아버님 얼굴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사진도 안남고..
사진도 안남고, 그러니까 너무 한스럽고 그래요. 돌아가신 뒤라도 어떻게 돌아가시든지 간에 얼굴이라도 얼굴도 볼수가 없는 그런 나이기 때문에
사진이라도 봤으면, 이렇게 생겼구나 어버지가 할텐데.. 너무 그게 참 한스럽습니다. 사진한장도 없이 이렇게 남김없이 되어버린것이..
사진은 있었겠지만 불에 타서 전소를 해버렸기 때문에 다 타버린 것이죠.
Q) 마을사람들은 다 타버렸으면 어디가서..
전부 집도 태워버리고 부모 형제도 잃어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들 친척집이나 친척이 없는 사람은 아는 지인들 집으로나 그렇게 다 피난을 갔었다 그래요
우리집 같은 경우는 숙부님이 작은 아버지가 같은면에 내동마을이라고 거기서 약 1년간 정도
집을 새로 짓기 전까지는 우리같은 경우는 그렇게 살고. 남들도 다 친척집에서 그렇게 살았다고 그럽니다. 인근마을로 가기도 하고
제일가까운 금산마을이라고 그쪽에도 여러사람들이 작은방에서 세 얻어서 들어가듯이 살았습니다.
아궁이 하나 받치고 밥만 어떻게 해먹고 잠만자고 그럴 정도였죠 뭐
Q) 가족중에 또 희생되신 분이 있나요?
우리 아버지하고 큰아버지, 큰어머니, 이마을에 큰집하고 우리 집 가운데고, 막내 작은 아버지는 낙안쪽에 계셨어요
그때 당시 분가를 해서 계셨으면 거기도 전부 사형당하고 그랬겠죠 다행히 없어서 그렇지.. 큰아버지, 큰어머니 두분다 또, 그때 당시 11살먹은 사촌누나,
그리고 고숙, 아버지 형제 그때당시 그분이 마을 이장을 했대요. 그래서 고문깨나 하고, 실토를 안하고 뭐 한것이 없는데..
그래서 물에다 쳐넣고 그때 이야기 어머니 얘기들어보면.. 그래도 안한것을 했다고 억지로 말할 수 없잖아요 결국은 고문을 당하니까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 죽어가고 그러니까.. 실토할 일은 없죠 밥해주고 그런일 밖에 없으니까.. 제일 피해가 많아요 우리집안이..
큰아버지, 큰어머니, 사촌누나, 고숙, 우리아버지..
Q) 추석이 추석답지 않았겠어요?
추석명절은 명절이라도 항시 슬픔에 젖어있죠.. 제사가 거의 우리어렸기 때문에, 지금은 70년이 넘었기때문에..
그때 당시만 해도 추석이 돌아와도 그렇게 명절이라는 그런 즐거운 마음도 사실없고, 우리마을은...
슬픔 속에 과거를 회상해 보면 그랬죠.. 추석답지 않게 명절이 지나가고 그랬어요
Q) 유년시절은 어떠셨어요?
나는 6월 7일에 음력으로 출생을 했고, 음력으로 8월 열이렛날이기 때문에 그때 당시 음력 윤달이 7월에 들었다고 해요. 한 백여일 남짓, 그정도일 때죠. 내가 대여섯살
철이 좀 들때부터 아버지는 어디가서 있냐고 어머니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내 위로 누나가 둘 있어요. 그때 당시 그러니까 기억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백여일 남짓인데
학교들어가면서 어머니한테, 누나들한테 아버지 어디 있냐고 그러고 물어보고 그랬어요.
어렸을때는 말해봤자 잘 모르기때문에 철이 들어서 주위사람들, 동네사람들, 어머니 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그런 사변이 일어났구나 생각했죠.
우리어머니도 고생많이 했고.. 저도 진학도, 배우고 싶은데 학교도 못가고 초등학교만 나와서 중학교를 친구들이 동네에서 가면 그렇게 부럽고 배우고 싶고 했지만..
어디 객지를 나갈수도 내가 가장이 되어버린것 아닙니까 누나들은 일찍시집가버리고.. 오로지 내가 농사를 지어줘야죠
Q) 아버님은 어떤분이셨어요?
주민들 이야기 들어보면 우리 아버지께서 그렇게 부지런하셨다네요. 자기일은 밤으로나 언제로 다 해버리고 주민들 일이나 이런것은 발 벗고 나서고 그리고
그때 당시만 해도 새밑고랑 내고 그런거 전부 아버지 혼자 다해버리고. 그렇게 부지런했다고 해요
학교다니면서도 아버지가 계셨으면 내가 여기서 이렇게 있겠냐.. 농사짓고 살겠냐 아버지 주민들 이야기를 들었을때도 그렇게 근면했으면 살림을 모으고..
얼마나 많이 벌었겠어요
우리마을에서 같은해 출생자가 9명이나돼요 그런데 공직자로 있는 사람들이 우리동네에서 5명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곳으로 이주를 해버렸고
그런데 그중에서도 아버지가 생존해계셨더라면 내가 너희들처럼(되었을텐데..) 그런게 너무 한스럽고 그러죠
저런사람들 저런친구들은 부모덕을 보고 부모가 생존해계서서 그런 사건을 안당하니까 진학을 하고, 우리처럼, 나처럼 고생도 안하고..
고생하는것을 자신을 원망해보고 그런적은 없었지만 내복이 그만큼인가보다 생각을 하고..
Q) 마을사람들, 그동안 많이 떠났죠?
많이 떠났죠.. 여기 지금 피해보신 분들만 하더라도 한 20여가구 이상이 떠났죠
Q) 45호 정도가 있었는데 그중에 20여가구가 떠나버린거예요?
사변당시 바로 그해. 바로그때부터 가버린 사람들이 있고 가족이 없어져 버리니까..
지금 현재 우리주민등록상으로는 27세대로 되어있는데 실제로 여기서부터 사변 난 전에 여기 생존해 계신분들은 15호도 못됩니다.
(절반도 안된..) 네 절반도 안되죠 (돌아가셔버리고 없고... 그럼 마을에 한 3분의 2가 떠나버렸다는 말씀이시죠 ) 네
돌아가셔버리고 없고 아들딸들은 객지에서.. 여기는 고향이 없어져 버리죠.
Q) 그럼 이쪽분들 중에는 몇분이나 남아계세요?
고향이라고만 하지 유족으로는 다섯세대 남아있어요 부모 형제를 잃어버리고 여기가 뭐 좋아서 농토나 터전이나 많고 그러면 살아질지도 모르는데 전망이 없기때문에..
Q) 처형장에 학교를 지었네요?
56년도에 이 학교가 건립이 됐어요. 그전에는 여기가 전부 논이었는데 우리 지역민들이 농토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우리 어머니부터 한 300평이상 기증해서 여러사람들이 기증을 해서 지역을 위해서 학교를 이쪽에 유치해야겠다 이설을 해야겠다고.. 봉사심이 좋은 분들이 자기논을 내놓으면서 (학교를 지었죠)
강질용씨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지난 과거사 위원회 조사를 통해 민사보상을 받았다
Q) 한이 좀 풀리셨나요?
저번 과거사위원회 판결난 것 가지고 난 보상이야.. 뭐 만족하겠습니까 얼마를 달라 그렇지는 않겠지만 보상도 미비해요
그동안에 고통받고, 못배우고 혼자 가장노릇 하다시피하면서 살아온 이 과정이 70년간을 그렇게 살아온 것이 뭣이 그거가지고 만족할게 있습니까
앞으로라도 우선은 명예획복은 되어야 하고 특별법이 제정되어서 정말 국가에서 위령 공원도 세워주고, 여기 주민들은 죄없이 국가 잘못으로 이렇게 사살시켰다 대통령이 사과해야죠. 우리 유족들 한테 정말로 잘못한 것을 유족들한테 (사과)해주고 명예회복도 (해주고..)
제21대 국회에서는 여순 10.19특별법이 제정되길 소망합니다.
여수10.19 특별법제정촉구 특별기획 증인 여수MBC
(본 영상은 마포꽃점 폰트로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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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 풀버전] #4 강질용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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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연도 | 2020. 10. |